[오늘의 인물] 2월 20일 김복한(金福漢·1860.7.24~1924.3.29) 독립과 애국으로 점철된 고난의 60평생

입력 2016-02-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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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의 의병장이었던 유학자 김복한(金福漢·1860.7.24~1924.3.29)은 병자호란 때 강화성에서 순절한 문충공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12대손이다. 선비의 매운 지조와 의열(義烈)의 피를 타고난 셈이다. 그런 분답게 60평생을 옥살이로 일관했다.

그는 1892년 별시 과거에 급제해 홍문관교리가 된 뒤 홍문관, 사간원, 승정원에서 일하다 1894년 갑오경장에 반발해 사임하고 충남 홍성으로 낙향했다. 1년 뒤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생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복역했다. 1896년 석방된 뒤 고종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완용(李完用) 등 을사오적 (乙巳五賊) 처단을 상소하고 또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두 번째 체포됐다. 그는 이때 일본군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불구가 됐다.

다음해인 1906년엔 참판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홍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체포돼 서울 경무청에 수감됐다. 재판 중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을사오적 처단 요구를 반복했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강탈당한 후에는 두문불출했다.

하지만 그가 가만있을 사람이던가. 이번엔 1919년 3·1운동 때 유림(儒林) 대표로 곽종석(郭鍾錫)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독립청원서를 보냈다가 네 번째 투옥됐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지 90여 일 만에 중병으로 석방됐다. 그 뒤 1921년 사립학원 인지사(仁智社)를 설립, 후진 양성에 힘썼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2005년 3월 그를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치열했던 애국지사를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모르고 있다. 홍성에 사당 추양사(秋陽祠)가 있다. fused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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