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자마자 지쳤다는 얘기를 습관처럼 늘어놓았다. 누구나 사는 게 복잡하겠지만 내 개인사도 꼬이고 얽혀, 일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거창할 것 없이 제주도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것도 혼자서.
여자 홀로 떠나려니 문제는 하나였다. 추억 삼아 남길 사진 한 장 찍어줄 이가 없다는 것. 그래서 나 혼자서도 야무지게 셀카를 찍을 수 있는 카시오 카메라를 챙겼다. 작고 예쁜데다, 화면을 셀카 각도로 들어 올리기만 하면 잽싸게 전원이 들어오는 구동력까지 갖췄다. 피부를 뽀샤시하게 만들어주는 뷰티 효과도 예술이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단 하나만 빼고. 난 왜 제주도에 폭설이 내릴 거란 사실을 몰랐을까?
그리하여 이 기사는 카시오 ZR55 리뷰를 가장한, 눈 오는 탐라도에 갇힌 과년한 처자의 자아 찾기 여행기 정도 되겠다.
자, 일단은 명색이 리뷰니까 카메라에 대한 설명부터 해보자. 사진을 잘 찍는 편도 아니고, 내 사진 찍는 것 외에는 별 관심도 없는 터라 내게 딱 맞는 제품이긴 했다. 게다가 정말 엄청나게 작고 가볍다. 딱, 쿠션 팩트 사이즈라서 여행용으로 챙겨간 손바닥 만한 가방에도 부담 없이 들어가더라. 무게는 200g 정도라서 화장품 하나 더 챙기는 수준 밖에는 안된다. 내가 사용한 제품은 상큼한 민트 컬러. 카메라가 나보다 사진발을 잘 받아서 질투날 정도…
역시 소녀(?)들의 카메라는 쉬워야 한다. 나는 아이폰 카메라 이상의 복잡함은 원하지 않으니까. 전원 켜고, 셔터만 누르면 어지간히 나오는 카메라가 좋단 얘기다. 깊게 생각할 것 없이 항상 자동 모드로 촬영하면 되니 그다지 어려울 것 없다. 솔직히 이렇게 간단한 기능의 카메라 치고는 인터페이스의 직관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 셀카가 잘 나오니까…
이 카메라의 핵심인 셀카 모드는 거의 예술이다. 틸트형 LCD는 180도까지 들어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내 얼굴을 편안하게 확인하며 촬영할 수 있다. 심지어 따로 전원키를 누르지 않아도, 셀카 각도로 LCD를 틸트하는 순간 전원이 들어온다. 전원 반응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라서 아무리 긴급한 상황에 촬영하는 셀카라도 담아낼 수 있을 것. 남자들은 아마 셀카 이머전시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흠흠, 이제 큼직한 3인치 LCD를 거울처럼 바라보면서 되도록 깜찍하고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끝.
한 가지 더 칭찬하고 싶은 건, 기본 셔터 키 외에도 카메라 전면부에 작은 셔터 버튼이 하나 더 마련돼 있다는 사실이다. 셀카를 찍을 땐 손가락 각도 상 카메라 상단에 위치한 셔터를 누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셀카 좀 찍어본 여자라면 본능적으로 이 작은 버튼에 손이 간다. 필살기 각도로 얼굴을 프레임 안에 넣은 뒤 자연스럽게 엄지손가락에 닿는 셔터를 눌러주면 흔들림 없이 셀카를 담을 수 있다. 아, 잘 나온다. 셔터 소리가 아주 작아서 커피숍에서 혼자 앉아서 사진 찍을 때 민망하지 않다는 것도 매력 포인트.
얼굴을 인식하면 자동으로 뷰티 효과가 들어가는데, 설정의 ‘메이크업’ 메뉴에서 입맛에 맞게 설정해 두면 된다. 미백과 피부톤, 피부의 매끄러운 정도(얼마나 뭉갤 것인지를 의미한다)의 레벨을 선택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기본 세팅된 상태로 쓰길 추천한다. 이거보다 과하게 뷰티 효과가 들어가면 너무 부자연스럽다.
피부톤이 어떤 느낌으로 표현되는지 설명하기 위해 나의 수줍은 셀카를 일부만 첨부한다.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주름이나 잡티, 세월의 흔적 같은 건 아주 자연스럽게 지워준다. 게다가 이게 일부 셀카 어플로 보정한 것처럼 과하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 얼굴만 인식해서 그 부분만 뽀샤시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머리카락이나 그 외의 디테일은 손상되지 않는다. 원래 하얀 편이라 메이크업 기능에서 미백 효과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매끄러운 피부 효과를 12단계 중 6단계로 설정하고 촬영했다. 자연스러운 물광 메이크업을 한 것처럼 피부톤이 깨끗하게 표현됐다.
셀카꾼들은 사진 각도를 보면 알겠지만 스마트폰 전면 카메라로 찍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세로로 촬영해도 그립이나 촬영 각도가 편하다는 뜻이다. 여행지에서 돌아와 사진을 확인하니 40%가 셀카더라.
괜히 머쓱하다. 하지만 어떡한담. 찍어줄 사람이 없었는걸. 참고로 손을 흔들어 셀카 타이머를 활성화하는 모션 셔터 기능도 있지만 창피해서 혼자 써보진 못 했다…
이제 나의 어설픈 리뷰 사진들을 살펴보자. 사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책 읽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고,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더라. 32년 만의 폭설이 내린다는 제주 날씨는 내 마음만큼이나 변화무쌍했다.
둘째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땐 창밖에 눈보라가 자욱했다. 전날 저녁까진 파란 지붕이었던 건너편 집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뽀송뽀송한 눈발이 먼지 날리듯 흩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몇 걸음 걷기도 힘들었다. 카메라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러다 잠깐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것 같아 종종걸음으로 외출을 하면 또 눈이 날렸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발 밑이 푹푹 꺼지는 눈길을 걸었다. 바람은 매섭고, 해는 야박했다. 그런데 괜히 또 그게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생각날 때마다 점퍼 주머니에 넣어둔 카메라를 꺼내 사진 한두 장은 남기려고 노력했다. 다행인 건 워낙 빨리 켜지고, 촬영 반응 속도가 빨라서 손이 시리기 전에 사진을 촬영하고 다시 넣어둘 수 있었다는 것. 셀카 외의 사진은 정말 닥치는 대로 찍었는데 흔들림도 적다. 그렇다고 기가 막힌 퀄리티의 작품 사진이 나오는 카메라는 아니지만 대체로 만족스럽다.
저조도 환경에선 어떤지도 한번 테스트해보았다. 확대해서 봤을 때 선명도가 아쉽긴 하다. 그래도 사진 분위기는 마음에 든다.
풍경사진보다는 아기자기한 스냅샷에 걸맞고, 대충 셔터를 눌러도 기복 없이 깨끗한 사진을 찍어주는 정도다. 하지만 카메라 울렁증을 간직한 내 수준엔 정말 좋았다. 그냥 쉽게 찍고, 오래 기억할 수 있으면 좋으니까.
한림 쪽의 한 카페에 갔었다. 전분공장을 개조해 카페로 만든 곳인데 지붕에서 햇볕이 그대로 투과돼 날씨가 변할 때마다 조명이 바뀌는 것 같았다.
따뜻한 음료 한잔 마시고 나오니 야트막하게 눈이 쌓여 있었다. 제주에 눈이라니, 하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시간 이후로 제주엔 북해도에서 봤던 것 같은 어마어마한 눈이 내렸지.
이튿날엔 눈발이 절정이었다. 온 세상이 하얗고 차가웠다. 꼬박 한나절을 고립되어 있다가 간신히 커피 한잔 마시러 나왔다. 창밖으로 바다가 흐릿하게 보이고, 커피는 쓰고 향긋했다. 그래서 두 잔이나 마셨다. 하루키의 수필집을 잠깐 읽었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캄캄하고 밖에서는 초겨울 찬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는 밤에 다 함께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소설.”
사실 대부분의 시간에 눈보라가 너무 심해서, 차마 카메라를 꺼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잠깐 눈발이 잦아든 해질녘에 바라보던 풍경이다. 바다가 출렁거리는 움직임을 혼자 바라보는 건 내심 무섭기도 했다. 이 순간만큼은 조금 더 좋은 카메라가 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사이 서울에 있는 사람들에게 끝없이 연락이 왔다. 괜찮은 건지, 돌아올 수 있는 건지 묻는 내용이었다. 나는 뉴스를 제대로 체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비행기가 결항되고 제주 공항이 폐쇄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날씨는 좀처럼 기분을 가라앉힐 생각이 없는 것 같았고, 바다 건너 서울이 한없이 멀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비행기 결항 소식을 들은 뒤로는 현실과 분리된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한편으론 초조하고 불안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굳은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한번도 내가 속한 적 없는 작은 섬에서 딱히 해야 할 일 없이 늘어난 시간을 보내는 건 기묘한 경험이었다. 마냥 좋지도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마지막 날에야 날씨가 조금 괜찮아져서 바닷가를 걸을 수 있었다. 여전히 하늘은 흐렸지만, 기분 좋은 바다 비린내에 코를 킁킁 거려 보았다.
괜히 아트 샷 효과로 이것저것 필터를 바꾸며 사진도 찍어보았다. 10가지 효과가 있는데 모노크롬 효과로 겨울 바다를 찍었더니 지금 내 모습만큼이나 쓸쓸하다. 사진은 마음에 드는데, 서울 와서 다시 보고 있으려니 정말 기가 막히게 처량하구나.
결국 일정보다 하루 늦게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상한 여행이었지만, 절대 잊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카메라와 함께 한 제주도 감금(…) 여행기였다. 내 표정이 화사하게 담긴 셀카와 쓸쓸한 제주도의 풍경을 모두 담아 왔으니 이 귀여운 카메라는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낸 것 같다.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어서 좋았다. 기기가 나를 방해하는 여행을 만들고 싶진 않았으니까. 혼자 여행을 떠나는 여자라면 이것보다 적당한 카메라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래, 리뷰인지 여행기인지 일기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사는 여기까지다. 여러분도 눈치껏 폭설만 피해서 여행 한번 다녀오시길 권하고 싶다. 제주도는 이제 안전하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 32년간 내릴 제주도의 눈을 모두 맞고 왔으니까…
떠날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제 얄팍한 내 일상에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괜히 피하고 싶은 마음에 떠났던 것 같다. 일단은 4년간 함께한 동료와 작별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러 떠나는 에디터 Y에게 인사를 전하며 마무리해야지. 행복하자. Y. 그리고 여러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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