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호의 세계는 왜?] 몰락한 HP, 사라진 그들의 문화…그리고 뻔뻔한 피오리나?

입력 2015-11-03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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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 휘트먼(맨 앞 왼쪽에서 두 번째) HP엔터프라이즈 CEO가 2일(현지시간) 뉴욕증권거래소에서 회사 상장 기념 오프닝벨 행사에 참석해 박수를 치고 있다. 뉴욕/AP뉴시스

멕 휘트먼 휴렛팩커드(HP) 최고경영자(CEO)가 2일(현지시간) 뉴욕증시에서 새로운 회사의 CEO로 등장했습니다. 바로 분사가 끝나 이날 상장하는 HP엔터프라이즈(HPE) CEO 자격으로 오프닝벨 행사에 참석한 것이지요.

행사장에서 휘트먼은 웃고 있었지만 그것을 보는 기자의 마음은 씁쓸했습니다. 창업자인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지난 1939년 팰로앨토의 한 차고에서 설립해 실리콘밸리의 모태가 됐던 기업이 몰락을 거듭한 끝에 분사라는 극약 처방을 내린 것이기 때문이지요.

한때 세계 최대 PC업체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 영광은 중국 레노버에 넘겨줬습니다. 모바일 시대로 접어들면서 HP라는 존재를 모르는 소비자도 많아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업 고객에 집중하고자 분사를 택했는데 투자자들의 반응이 냉소적인 것도 HPE의 불안한 앞날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상장 첫날 HPE 주가는 1.6% 하락했습니다. 반면 PC와 프린터 등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HP주식회사 주가는 13% 가까이 폭등했지요.

IT산업은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HP 몰락에는 기술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한 것 이외에도 기업 경영진들이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이유가 많은 것 같네요. 블룸버그통신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주요 외신들은 몰락의 주원인으로 실적 부진 이외 CEO들의 거듭되는 M&A 실패, 기업문화의 실종 등을 꼽았습니다.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선 칼리 피오리나 전 HP CEO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연설하고 있다. 디모인/AP뉴시스

지난 9월 16일 CNN이 주최한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토론회에서는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와 칼리 피오리나 전 HP CEO가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트럼프는 당시 피오리나의 약점을 절묘하게 찔렀지요. “그 딜이 HP의 파멸을 초래했다” 바로 피오리나가 2001년 발표한 컴팩과의 합병을 가리킨 것입니다. 피오리나는 포춘500대 기업 첫 여성 CEO로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컴팩과의 합병으로 회사는 세계 최대 PC업체에 올랐지요. 그러나 창업자 가문 등 주요 주주들의 반대에도 무리하게 합병을 진행한 결과 이익을 내지 못했습니다.

피오리나는 그 밖에도 강압적인 경영방식과 고액의 보수, 회사 전용 제트기를 타고 돌아다니는 톡톡 튀는 행동 등으로 비난을 받은 끝에 결국 2005년 2월 해임됐습니다. 제프리 소넨필드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IT업계 사상 최악의 CEO 중 한 명”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피오리나의 후임자들도 회사를 망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크 허드는 성추행 파문으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것은 물론 일렉트로닉데이터시스템스(EDS) 인수로 회사에 80억 달러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레오 아포테커도 경영 부실을 숨겨온 오토노미를 110억 달러에 인수해 결국 HP는 88억 달러를 상각 처리해야 했습니다. 2011년 9월 취임한 멕 휘트먼은 이베이를 세계 최고 전자상거래업체로 키운 거물이지만 HP를 부활시키지는 못했네요.

무엇보다 피오리나를 비롯한 역대 HP CEO들은 ‘HP 방식(HP Way)’이라는 직원들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기업문화를 헌신짝처럼 내던진 죄가 가장 크다고 봅니다.

자주성과 팀워크를 중시하고 직원을 신뢰와 믿음으로 대하는 인간 중심의 문화가 ‘HP 방식’이라고 합니다. 참 근사한 말이지요. 솔직히 이런 문화가 남아있었으면 HP가 어떻게든 회생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오리나는 CEO 재임 시절 구조조정 명목으로 3만명을 감원했습니다. 그 당시 한 순간에 거리로 내몰렸던 HP 전 직원들이 피오리나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참 뻔뻔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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