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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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굶주림과 추위에 떨게 한 이 다섯 가지는 사실 강한 자부심과 기개의 표현이었다. ‘행난(行難)’이라는 글에서는 “내 생각을 버리고 남의 말을 따르는 것이 고역”이라는 말도 했다. 그는 올곧고 매운 선비였다.
섬서[陝西]성의 법문사(法門寺) 호국진신탑(護國眞身塔)에는 불골(佛骨, 부처의 손가락뼈)이 봉안돼 있다고 알려졌다. 30년마다 탑문이 열리는 해에는 대풍이 든다고 했다. 불교신자인 헌종이 불골을 맞이해 오라고 하자 법문사-장안 간 수백리 길에 난리법석이 벌어졌다. 형부시랑이던 한유는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 이 ‘광란의 행사’를 당장 중지하고 불골을 물이나 불 속에 집어 던지라고 했다.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으나 아끼는 이들이 간언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유종원(柳宗元·773~819)이 죽었을 때는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에 이렇게 썼다. “선비의 의리는 궁핍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요즘 사람들은 (중략) 죽어도 변치 말자고 맹세한다. (중략) 하지만 일단 머리털 같은 자그마한 이해관계에 부딪히면 모르는 사람 취급한다. 함정에 빠져도 구해 주기는커녕 되레 밀어뜨리고 다시 돌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