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드라마 제작 편수가 2년 만에 약 30% 감소하는 등 K드라마 산업이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제작사와 작가, 배우, 방송사 등 업계 관계자들이 정부에 1조원 규모의 중장기 투자ㆍ지원체계 구축을 촉구했다.
4일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등 방송 드라마 관련 12개 단체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K드라마 산업 위기 극복을 위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국내 드라마 산업의 위기 상황과 이를 타개하기 위한 정책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송병준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회장과 김희열 부회장, 김종창 한국드라마PD협회 회장, 송영웅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이사장, 박해영 한국방송작가협회 저작권위원장, 김태봉 한국방송촬영인협회 회장 등이 참석해 각 분야가 직면한 어려움을 전했다.
송병준 회장은 "몇 년 전만 해도 150편에 육박하던 방송 드라마 편성이 약 30% 줄었다"며 "지금은 K드라마의 앞으로 10년을 내다봐야 하는 때"라고 기자회견 개최 취지를 설명했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에 따르면 국내 드라마 제작 편수는 2022년 141편에서 2년 만에 약 30% 감소했다. 지상파 3사의 드라마 편성 역시 2012년 91편에서 2023년 32편으로 줄어들었다.
업계는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등장에 따른 제작비 상승과 기존 방송사의 투자·편성 축소, 제작사의 지식재산권(IP) 확보 어려움 등을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특히 제작 편수 감소가 단순한 산업 규모 축소를 넘어 신인 창작자의 진입 기회를 막고 숙련된 제작 인력의 이탈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해영 작가는 "드라마를 끝내고 나면 다음 프로그램을 보조작가에게 넘겨줘야 하는데 제 밑의 보조작가들이 다 일을 못하고 있다"며 현장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어 "그동안 드라마 산업이 좋았기 때문에 작가들이 있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상태"라며 "작가들이 숏폼이나 웹 기반 콘텐츠, 게임 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저의 꿈은 재미있는 드라마를 계속 볼 수 있는 것"이라며 "외국 거대 자본에 종속돼 이끌려가는 상황을 끊고 한국 드라마가 자체적으로 제작될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강조했다.
배우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약 1만8000명의 배우와 성우, 코미디언 등이 소속된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는 드라마 제작 감소가 출연자의 수익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밝혔다.
송영웅 이사장은 "2025년에 사용료가 130억원 줄었다"며 "제작 편수와 제작비가 줄면서 출연 인원도 감소한 것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촬영 현장에서는 숙련된 인력의 이탈과 열악해지는 노동환경이 문제로 떠올랐다.
김태봉 회장은 "제작 편수의 하락이 단순한 양적 하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오랜 경험과 기술을 쌓아온 스태프들이 축적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현장을 떠나야 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스태프들의 인건비와 제작 여건이 악화하는 가운데 표준계약서조차 작성되지 않는 사례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업계가 정부와 국회에 제시한 핵심 요구는 △연간 드라마 제작 편수 회복의 국가 정책목표 설정 △1조원 규모의 중장기 K드라마 투자ㆍ지원체계 구축 △범정부 차원의 종합 대응 등 세 가지다.
단체들은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되는 작품뿐 아니라 중저예산 드라마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지속적으로 제작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1조원 규모의 지원은 일회성 예산 투입이 아닌 중장기적인 산업 생태계 복원을 목표로 한다는 설명이다.
송병준 회장은 "1조원을 중장기적으로 투자하자는 것"이라며 작품당 약 100억원 규모의 드라마를 지원 대상으로 제시했다.
그는 "신인을 채용할 기회를 주고 한 사람에게 제작비가 몰리는 관행을 없애 여러 신인에게 기회가 돌아갈 수 있는 건강한 구조의 드라마에 예산을 지원해 달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희열 부회장은 약 5년에 걸친 지원 방안을 제안했다. 회당 제작비 약 8억원 수준의 드라마를 기준으로 국내 방송사들이 일정 편수를 제작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제작비 일부를 분담하는 방식이다.
김 부회장은 "현재 드라마 제작비의 절반 수준인 회당 8억원 정도를 보고 있다"며 "케이블을 포함한 7개 방송사가 연간 5편 정도의 드라마를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면 제작 편수 회복에 경쟁력이 생길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김 부회장은 제작 편수 회복의 목표가 과거 수준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2022년 제작 편수인 141편을 무조건 다시 만들어 달라는 의미는 아니라며 지속 가능한 제작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OTT 중심으로 재편된 드라마 제작ㆍ유통 구조에 대한 우려도 이어졌다.
업계는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가 K드라마의 해외 진출과 작품의 질적 성장에 기여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제작비 상승과 기존 방송사의 경쟁력 약화라는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진단했다.
송병준 회장은 "글로벌 OTT가 한류를 이끄는 데 일조하고 드라마의 격을 한층 높여준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제작비 상승은 그들로부터 시작됐고 레거시 미디어가 그 제작비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제작 편수가 급감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해외 유통시장에서 한국 드라마의 구매 경쟁이 줄어들면서 수출 단가가 하락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송 회장은 해외 구매사들이 작품의 내용이나 완성도보다 특정 스타 배우의 출연 여부를 우선시하는 구조가 제작비 상승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그는 "해외에서 한국 드라마가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구매를 줄이기 시작했다"며 "구매를 위해서는 특정 리스트에 올라 있는 특급 배우들을 요구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결국 방송사들도 드라마의 내용이나 만듦새보다 누가 출연하고 캐스팅됐는지를 편성의 우선 조건으로 삼게 된다"며 "수요가 많은 배우들의 제작비가 계속 올라가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자구책으로 신인 배우 발굴과 경쟁력 있는 이야기 개발, 방송사의 적극적인 협력 등을 제시했다.
글로벌 OTT의 IP 독점 구조에 대한 개선 요구도 나왔다.
송 회장은 "글로벌 OTT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IP를 완전히 가져가지 않는 구조와 성공에 걸맞은 이익 배분"이라고 강조했다.
송영웅 이사장은 글로벌 OTT와 국내 실연자 단체 사이의 권리 협의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넷플릭스가 기존 방송사와 달리 방송법의 규율을 받지 않는 플랫폼 사업자라는 점을 언급하며 협회 차원의 요구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넷플릭스 미국 본사 및 넷플릭스코리아 측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실질적인 협의에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밝혔다.

산업계의 위기 호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방송영상 관련 지원 예산은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2027년 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의 방송영상 분야 예산은 2026년 918억원에서 873억원으로 45억원 감소했다.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의 방송콘텐츠 진흥 예산도 같은 기간 168억원에서 124억원으로 44억원 줄었다.
반면 해외에서는 콘텐츠 산업에 대한 전략적 투자를 확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드라마 등 실사 콘텐츠의 해외 진출을 국가 전략으로 설정하고 2033년까지 관련 수출액을 2500억엔(약 2조1220억원) 이상으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업계는 K드라마에 대한 지원이 단순히 특정 산업을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 국가 경제와 문화 경쟁력을 위한 투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에 따르면 2025년 한류 관련 총수출액은 189억7500만달러(약 25조3940억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소비재와 관광 수출은 87억8800만달러(11조8110억원)로 집계됐다.
드라마를 통해 형성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음식과 화장품, 패션, 관광 등 다양한 분야의 소비로 이어지는 만큼 제작 기반을 유지하는 것이 국가 경제에도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김종창 회장은 드라마가 산업적 가치뿐 아니라 문화적 공공성도 지닌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령화 사회에서 돈을 내지 않더라도 아주 쉽게 안방에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드라마"라며 "문화는 공공재로서 활용돼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을 수용해야 한다는 점에도 공감하면서 드라마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단체들은 정부와 국회에 중장기 투자체계 설계를 위한 논의에 착수하고, 2027년도 예산 심의 과정에서 중저예산 작품과 신진 인력 지원을 적극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울러 업계 내부에서도 제작비 구조를 합리화하고 공정한 제작 관행을 정착시키는 등 자구 노력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송병준 회장은 "한류는 글로벌 OTT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성공했다"며 "지금은 그 규모가 줄어들고 생태계가 위험에 빠져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지금은 지난 성공을 돌아볼 때가 아니라 K드라마의 다음 10년을 준비할 때"라며 정부와 국회의 적극적인 대응을 거듭 촉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