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설립 대한천일은행부터 은퇴한 AI 안내 로봇까지
은행원 박경리 발자취·페이커 친필 사인 등 이색 전시도

“은행의 역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기도 합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 남산 자락과 명동을 잇는 중구 회현동의 우리은행 본점 지하 1층에 마련된 ‘우리1899’ 박물관. 23일 이곳에서 만난 박물관 소속 이기정 학예사는 대한제국 황제로 우리에게 익숙한 고종과 영친왕의 사진을 가리키며 우리은행의 뿌리를 되짚었다.
1899년 설립된 우리은행의 전신 대한천일은행은 고종에게 3만원(현재 가치로 30억원)을 투자받아 당대 경제개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기관이었다. 이 학예사는 “고종 옆에 있는 영친왕 역시 대한천일은행의 2대 은행장으로 역임해 우리은행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고 설명했다.
우리1899는 은행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안에 녹아든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곳이다. 우리은행은 2004년 7월 국내 최초의 은행 역사 전문박물관인 은행사박물관을 개관했다. 박물관은 지난해 말 리노베이션을 거쳐 역사·복합문화 전시 공간인 우리1899로 새단장했다.

‘은행을 기억하다 : 우리 생활 속의 은행’ 관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은행의 사람들인 직원과 고객의 역사를 다룬 다양한 유물이 늘어섰다. 한일은행과 한국상업은행 은행원이 착용하던 실제 근무복이 나란히 놓여 눈길을 끌었다. 우리은행의 모체인 두 은행은 IMF를 거치며 1998년 합병됐다. 그 옆에는 당시 은행 고객들이 사용했던 현금봉투와 두 은행이 고객들에게 제공했던 달력과 재떨이 등 세월이 담긴 은행 사은품들이 자리했다.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물건에서 당시 은행 창구의 풍경이 느껴졌다.

한켠에서는 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이 흘러나왔다. 박 작가는 등단 전 1954년 1월부터 1955년 2월까지 한국상업은행 용산지점에서 근무했다. 이 학예사는 “박 작가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우리은행과 토지문화재단이 업무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진열장 속 실제 직원 명부에는 박 작가의 본명인 ‘박금이’에 화살표 표시가 되어 있었다. 박 작가가 등단 첫해 쓴 ‘전생록’이 수록된 사보 ‘천일 11호’도 함께 전시됐다. 또다른 작품 ‘바다와 하늘’의 원문 내지를 재현한 전시물은 관람객들
이 직접 페이지를 넘기며 작품을 감상이 가능했다. 현대 한글 표기와 주석도 달려 있어 한자를 잘 몰라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계단을 따라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따뜻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우리은행 라이브러리’가 나타났다. 박 작가의 작품을 모은 서고 외에도 ‘은하수’, ‘돌아온 고양이’ 등 동화들도 갖춰져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방문객도 함께 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다시 지하 1층으로 올라오자 익숙한 얼굴과 마주했다. 글로벌 e스포츠 스타 페이커다. 그의 자필서명과 그가 속한 세계 최정상 구단 T1의 로고를 넣은 체크카드가 전시돼 있었다. 1899년부터 시작된 은행의 역사가 펼쳐진 박물관에서 현대 대중문화의 상징인 페이커가 더해지자 이색적인 그림을 만들었다. 우리은행은 T1의 공식 스폰서다.
이 학예사는 “우리은행 행사에서 은행장이 페이커에게 사인을 받았다. 페이커가 사인을 해주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 사인을 봤으면 좋겠단 마음으로 은행장이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전시 배경을 전했다.

건너편에는 흰색 휴머노이드형 로봇 ‘페퍼’가 관람객을 맞이하듯 서 있었다. 페퍼는 2017년 은행에 인공지능(AI) 업무가 도입되면서 등장한 안내 로봇이다. 고객을 맞이하고 창구 안내와 금융 상품 소개, 이벤트 안내 등의 업무를 수행했지만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났다. 은행의 첨단 기술을 상징했던 로봇이 어느새 유물이 된 셈이다.
고종과 영친왕의 사진부터 AI 안내 로봇까지. 127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우리1899는 금융의 변천사뿐 아니라 시대를 함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