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광장-설동훈의 사회읽기] ‘숫자’가 판단을 독점하지 않는 대학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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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잣대만으론 잠재력 평가 못해
실패 용인하고 기다리는 제도 필요
양적비중 줄이고 공공 기여 인정을

스웨덴 한림원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캐나다 시인이자 고전학자 앤 카슨을 선정했다. 그는 1980년대 프린스턴대학에서 가르쳤으나 정년 보장을 받지 못했다. 뒤늦은 영예는 대학의 판단을 되묻게 한다. 한 세대 전의 판단을 오늘의 잣대로 재단하기는 조심스럽다. 그러나 분과의 경계를 넘나든 성취를 기존 평가기준이 담아낼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남는다. 대학은 익숙한 잣대로 설명되지 않는 비범함을 알아볼 안목을 갖추고 있는가?

문제의 핵심은 창의성을 식별하는 방식이다. 대학은 논문 편수, 피인용 지수, 연구비 수주액으로 연구자를 평가한다. 가시적 성과를 비교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연구자의 잠재력은 당장의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다. 학술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신진 연구자를 길러내며, 지식을 지역사회와 나누고,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작업 등도 지표 뒤로 사라지기 쉽다. 학문은 개별 실적의 합계가 아니라 이런 기여들이 맞물려 성장하는 생태계다.

생성형 AI는 이 맹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편수가 곧 실적인 구조에서는 원고를 빠르게 양산하는 도구에 의존할 유인이 커진다. 논문 작성의 문턱은 낮아졌지만, 동료 평가와 검증에 필요한 시간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생산량의 증가가 지식의 진전을 뜻하지 않는 이유다. 더구나 익숙한 질문과 접근법을 반복하는 연구가 유리해지면, 개별 연구자의 합리적 선택이 공동체의 지적 다양성을 위축시킬 수 있다.

측정 지표가 목표로 둔갑하면 진리 탐구는 뒷전으로 밀리고 지표 관리의 기술이 앞선다. 국제학술지의 위상을 연구의 가치와 동일시하는 풍토에서는 한국사회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문제의식과 모국어 지식의 축적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세계 학계와 소통하는 일과 한국사회를 깊이 이해하는 일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두 과제를 연결하는 연구야말로 대학이 북돋워야 할 성취다.

그렇다면 평가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첫째, 양적 지표의 비중을 줄이고 소수의 대표 업적을 면밀히 검토하되, 장기 연구에는 그에 맞는 평가 주기를 보장해야 한다. 둘째, 피인용 횟수뿐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고 후속 담론의 지평을 열었는지 물어야 한다. 셋째, AI 활용은 투명하게 밝히도록 하고, 논증과 결과에 대한 책임은 연구자에게 엄격히 물어야 한다. 넷째, 학술 저서와 번역서, 모국어 연구와 공공 지식 생태계 구축을 핵심 기여로 인정해야 한다.

정성 평가라고 저절로 공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의적 판단과 학문적 위계가 개입할 위험을 줄이려면 평가기준과 심사 소견을 공개하고, 다학제적 교차 검토를 제도화해야 한다. 요체는 수치의 폐기가 아니라 그 위상의 재조정이다. 수치는 판단을 돕는 참고 자료이지 판단 그 자체가 아니다.

한국이 글로벌 연구 거점으로 도약하려는 지금, 이 과제는 더욱 절박하다. 인재 이동의 흐름이 바뀌더라도 우수한 연구자가 저절로 한국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방문의 문턱을 낮출 수는 있어도 평생을 바칠 연구 환경까지 보장하지는 못한다. 학문의 중심은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곳이 아니라, 국경을 넘은 연구자들이 정착해 낯선 질문을 벼릴 수 있는 곳이다.

인재 유치는 입국과 채용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낯선 연구를 이해할 동료, 실패를 감당할 시간, 성과가 드러나기까지 기다려 줄 제도가 있어야 한다. 실적만 요구하면서 세계적 연구자를 길러내겠다는 기대는 모순이다. 잠재력을 알아보는 안목과 잠재력이 자랄 여건을 마련하는 책임은 분리될 수 없다.

계량 지표에 잡히지 않는 가능성을 알아보고 기다려 줄 제도적 품격이 없다면 도약은 불가능하다. 프린스턴대학이 한때 놓친 학자를 한국의 대학은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길들여지지 않은 가능성을 식별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제도를 갖춘 곳에서 글로벌 지적 중심은 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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