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공정한 승계’라는 이름의 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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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장이 되려면 누구의 신뢰를 얻어야 할까. 요즘 금융권 분위기를 보면 금융당국의 눈도장이 가장 중요해 보인다.

연말 금융권 인사철을 앞두고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최고경영자(CEO) 승계 문제를 거듭 꺼내 들었다. 지난 15일 금감원 임원회의에서 금융지주 자회사 CEO 승계 절차가 미흡하다며 후보 검증 강화와 자회사 임원후보추천위원회(임추위)의 실질적 역할 확대를 주문했다. 23일에는 8개 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연합회장을 만나 “특정 계파나 친소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능력에 기반한 적임자를 선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충신 ‘기황양’ 고사까지 소환했다. 인재를 천거할 때 밖으로는 원수를 피하지 않고 안으로는 아들을 피하지 않았다는 일화를 들며 공정한 승계를 역설했다.

취지만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금융회사 CEO 선임이 특정 인맥이나 계파에 좌우되고 후보를 미리 낙점한 채 요식 절차만 밟는다면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문제는 감독당국의 개입이 원칙론을 넘어 지배구조의 세부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감원은 지주 자회사대표이사후보추천위원회가 관리해온 후보군 정보를 은행 임추위와 공유하고 은행 임추위에 후보 추천권을 부여하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지주 중심의 인사권을 사실상 강제로 분산하라는 요구다.

금융지주가 자회사의 경영 결과를 책임지려면 그에 상응하는 인사권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룹 전체 전략을 세우고 자본을 배분하며 실적을 책임지는 주체가 지주인데 핵심 자회사 CEO 선임 권한을 강제로 떼어내면 권한과 책임의 균형추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올해 상황은 유독 민감하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장의 임기가 일제히 12월 말 끝난다. 주요 금융그룹으로 넓히면 올해 말 임기가 만료되는 계열사 CEO만 54명에 이른다. 금융권 최대 인사 시즌을 목전에 둔 시점에 감독수장이 연이어 승계 구조를 공개 압박한 셈이다.

금융사 입장에서는 이를 단순한 원칙론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검사와 제재권을 쥔 감독수장이 '바람직한 승계 구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그것은 곧 명문화된 지침이나 다름없다.

금융권 반응은 즉각적이다. 신한금융은 은행 임추위에 후보군 정보를 공유하고 은행장 후보 추천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KB금융과 우리금융도 은행 추천위원회의 역할 확대를 검토하거나 추진 중이다. 당국의 메시지가 나오기 무섭게 앞다퉈 지배구조를 손질하는 풍경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이런 관행이 반복되면 금융회사의 쇄신 기준은 시장과 주주가 아닌 감독당국의 눈높이에 종속된다. “우리 조직에 어떤 지배구조가 최적인가”를 고민하기보다 “금감원이 바라는 그림이 무엇인가”를 먼저 계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사는 자본비율이나 대출총량 같은 정량 지표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누구에게 지휘봉을 맡길지는 기업 경영의 핵심이자 자율의 영역이다. 감독당국은 자격 요건과 검증 절차가 투명한지 이사회가 독립적으로 기능하는지 밀실 인사가 벌어지지 않는지를 감시하는 심판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인사철마다 감독수장의 말 한마디에 금융권 전체가 살얼음판을 걷고 그에 맞춰 지배구조를 뜯어고치는 구조는 정상적이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당국 '눈치보기식 쇄신'이 아니라 금융사가 스스로 선택하고 시장 앞에서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자율적 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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