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 이해관계자경영 시대] 퍼스트 무버의 조건 ‘이해관계자경영’

기사 듣기
00:00 / 00:00

AI 시대에 한계 맞은 주주자본주의
‘가치 공동 창출’ 동반자 인식 확산
삼성·SK 성공도 신뢰생태계서 나와

한국 경제는 지금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선진국의 기술과 시스템을 신속하게 벤치마킹하여 추격하던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방식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AI 혁명이 산업의 지형을 흔들고 시장의 불확실성이 극에 달한 지금, 우리가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장 먼저 개척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러나 퍼스트 무버가 되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선두에 선 기업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데이터나 경험만으로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시대에는 한 가지 정답만 찾아서 달리는 일명 ‘린(Lean) 방식’이나 단기 재무 성과에만 집착하는 경영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수십 년간 기업 경영을 지배해온 주주가치 극대화 중심의 주주자본주의 역시 단기 실적 집착, 협력 생태계 약화, 고용 불안, 사회적 신뢰 저하라는 치명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새로운 길을 열려면 하나의 정답에 올인하는 대신, 여러 가능성에 동시다발적으로 베팅하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초일류 기업도 그 거대한 위험과 막대한 매몰 비용을 혼자 감당할 수는 없다. 실패의 충격을 흡수하고 마찰을 버텨내려면 생태계 전체를 내 편으로 만드는 단단한 지지 기반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바로 퍼스트 무버에게 ‘이해관계자경영’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이유다.

이해관계자경영은 흔히 생각하듯 시혜적인 사회공헌이나 막연한 도덕적 윤리 경영이 아니다. 최신 전략 경영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철저한 혁신 전략이자 생존 전략이다. 과거의 경영이 이윤을 먼저 계산하고 주주 이외의 주체들을 단지 거래 대상이나 설득 대상으로 봤다면, 이해관계자경영은 협력사, 임직원, 소비자, 지역사회를 대등한 동반자로 대우하며 ‘가치 공동 창출(Value Co-creation)’을 이루어내는 것이 핵심이다.

이미 글로벌 시장과 한국 산업 현장에서는 이러한 가치 공동 창출을 통해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로 도약한 사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찍부터 이해관계자경영을 핵심 이념으로 삼은 교보생명이나, 기업의 존재 이유를 단기 이윤에서 ‘모든 이해관계자의 행복과 가치 추구’로 전환한 SK그룹의 결단은 기업 경영의 목적 함수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극한의 기술적 불확실성을 극복한 네덜란드 글로벌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의 성공 뒤에는 핵심 고객사 및 공급망과의 깊은 동반자적 연대가 있었다. 미래 기술의 성공 여부가 불투명할 때, ASML은 혼자 위험을 짊어지는 대신 주요 파트너들과 로드맵을 함께 하고 투자를 공유함으로써 초미세 공정의 독점적 리더십을 확보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을 일군 삼성 역시 거대한 투자 불확실성과 천문학적인 매몰 비용이라는 위험 속에서도 생태계 전체와의 확고한 신뢰와 동시다발적인 자원투입을 통해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문화 산업의 신화를 쓴 K팝 역시 마찬가지다. 기획사 홀로 혁신과 성과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작곡가, 분야별 전문가, 그리고 세계적인 팬덤을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공동 창작자’이자 소중한 이해관계자로 끌어들임으로써 글로벌 음악 시장의 퍼스트 무버로 발돋움했다.

앞으로 AI 시대가 본격화될수록 이해관계자경영의 파괴력은 더 커진다. 기술이 아무리 고도화되어도 사람 간의 존중과 배려, 책임과 공감이라는 ‘신뢰’는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AI 경쟁은 우수한 알고리즘 하나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데이터 수용성, 개발자의 창의성, 파트너십, 그리고 소비자의 신뢰를 하나의 단단한 생태계로 엮어내는 ‘조직력’에서 승부가 갈린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이해관계자경영이 우리에게 결코 낯선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해관계자경영은 동양철학이 오랜 세월 강조해온 ‘사람 중심’의 가치와 ‘공동체 정신’을 현대 기업 경영의 언어로 풀어낸 것과 같다. 사람을 귀히 여기고 함께 상생하는 문화는 우리 문화적 DNA 속에 이미 익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깊은 철학적 자산은 한국 기업들이 불확실한 미래를 담대하게 개척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단단한 신뢰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타국 기업이 가질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수 있다.

이제 경영자는 관점과 틀을 바꿔야 한다. 임직원은 ‘비용’이 아닌 ‘혁신의 원천’이고, 협력사는 ‘하청’이 아닌 ‘공동 혁신 파트너’이며, 소비자는 ‘구매자’가 아닌 ‘동반자’다. 정책 당국 역시 단기 수익보다 장기적 생태계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에 보상하는 제도적 판을 깔아주어야 한다.

기술은 미래 시장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을 열고 들어가 지속 가능한 경쟁 우위를 완성하고 퍼스트 무버가 되는 힘은 바로 ‘신뢰’에서 나오며, 그 신뢰를 만들어내는 근본은 이해관계자경영에 있다. 극단적 불확실성의 시대, 고립된 섬이 되기보다는 생태계 전체의 신뢰를 조직하는 기업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미래를 이끌 진정한 퍼스트 무버가 될 것이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뉴스
많이 본 뉴스
댓글
0 /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