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오픈 멈춘 '인생샷'…스포츠-인플루언서 불편한 동행 [이슈크래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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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카를로스 알카라스가 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US오픈 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4회전에서 미국의 토미 폴을 상대로 서브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한 포인트가 승부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접전. 나오미 오사카(일본)가 서브를 준비한 순간, 관중석에서는 느닷없이 링라이트가 켜졌는데요. 모든 시선은 코트가 아닌 관중석으로 향했죠. 코트를 등지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서요.

포인트가 시작된 뒤에도 촬영은 계속됐고 결국 주심이 경기를 멈춰 세웠습니다. 선수들의 치열한 승부가 관중의 ‘인생샷’에 가로막힌 순간이었죠.

지난달 31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뉴욕 빌리진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에서 열린 오사카와 아나스타샤 자하로바(러시아)의 2026 US오픈 여자 단식 1회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오사카는 두 세트 모두 타이브레이크까지 치른 끝에 7-6(6) 7-6(3)으로 승리했지만, 경기 뒤 더 많은 시선을 끈 것은 코트 위 승부가 아닌 관중석의 촬영 소동이었습니다.

한 번의 해프닝도 아니었습니다. 1일 매디슨 키스와 알리나 코르네예바의 여자 단식 1회전에서는 한 관객이 경기가 진행 중인 코트를 등지고 핸드백을 든 채 촬영하는 모습이 포착됐죠. 선수들이 포인트를 다투는 순간에도 촬영용 조명이 켜져 있었는데요. 코트가 승부의 무대가 아닌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위한 배경으로 취급됐죠.

올해 US오픈에서는 이처럼 경기보다 자신의 사진과 영상을 남기는 데 몰두한 관중을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회가 공식 크리에이터의 문을 넓히고 후원사와 기업도 인플루언서를 적극적으로 초청하면서 경기장 전체가 거대한 콘텐츠 제작 현장으로 바뀌었는데요. 새로운 관객을 끌어들이려는 스포츠계의 선택은 수억 번의 조회수를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선수의 경기와 기존 팬의 관람을 방해한다는 반발도 불러왔습니다.


▲일본의 나오미 오사카가 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플러싱메도스의 USTA 빌리진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에서 열린 US오픈 테니스대회 여자 단식 4회전에서 카자흐스탄의 엘레나 리바키나를 상대로 경기를 펼치고 있다. (EPA/연합뉴스)


“레드카펫에 청바지 입나”…선수들도 불만

오사카는 3일 2회전을 마친 뒤 “스포츠 행사에 왔다면 그 스포츠를 존중해야 한다”며 관람 예절을 미리 익히는 것은 기본적인 배려라고 지적했습니다. 인플루언서가 새로운 팬에게 테니스를 알리는 효과는 긍정적이지만, 그만큼 적절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죠.

여자 세계랭킹 4위 코코 고프(미국)는 같은 날 파울라 바도사(스페인)를 꺾은 뒤 “레드카펫에 초대받았다면 청바지를 입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며 장소에 맞는 예절을 강조했는데요. 경기 중 플래시를 터뜨리거나 큰 소리로 말하고, 포인트 도중 틱톡 영상을 찍는 무매너를 지적했죠. 초청 브랜드도 관람 수칙을 안내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세계랭킹 3위 제시카 페굴라(미국)도 음식과 쇼핑 등 대회의 다양한 매력을 알리는 효과는 인정하면서도 경기 도중 사진을 찍거나 셀피 조명을 사용하는 행동은 “조금 무례하다”고 비판했죠. 선수들에게 테니스는 직업이자 생업인데 올해는 촬영 열기가 지나치다는 지적이었는데요.

논란은 US오픈의 어수선한 관중 환경과 맞물려 더욱 커졌죠. 아드리안 만나리노(프랑스)는 경기 중에도 관중이 이동하고 소음이 끊이지 않는 데다 마리화나 냄새까지 난다며 대회장이 “조금은 동물원처럼 변했다”고 토로했습니다.


▲관중들이 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US오픈 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4회전에서 아르헨티나의 프란시스코 세룬돌로와 벨기에의 알렉산더 블록스 간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54명에서 올해 약 100명…US오픈이 열어준 문

인플루언서가 부쩍 늘어난 것은 US오픈의 전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미국테니스협회(USTA)는 2025년부터 소셜미디어 크리에이터에게 별도의 미디어 자격을 부여했는데요. 첫해 54명이었던 공식 크리에이터는 올해 약 100명으로 늘었고, 이 가운데 약 20명은 대회장의 음식과 음료를 전문적으로 소개합니다.

US오픈은 대표 칵테일 ‘허니 듀스’와 캐비아 치킨 너깃, 선수 패션과 공연 등을 앞세워 대회를 종합 문화행사로 확장하고 있는데요. 음식·패션·여행 크리에이터를 통해 테니스에 관심이 없던 사람까지 끌어들이려는 전략이죠. USTA는 팬들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에 맞춰 다가가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했다고 설명했는데요.

다만 논란의 당사자들이 실제 인플루언서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USTA는 오사카 경기에서 소란을 일으킨 스위트룸 관객들이 협회가 취재증을 발급한 공식 크리에이터는 아니었다고 밝혔는데요. 논란 이후 USTA는 안내 표시를 늘리고 티켓 구매자와 스위트룸 이용자에게 경기 중 플래시와 링라이트 사용을 삼가달라고 공지했습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알카라스가 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퀸스 플러싱의 USTA 빌리진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에서 열린 2026 US오픈 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4회전에서 미국의 토미 폴과 경기를 치르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AFP/북미게티이미지/연합뉴스)


월드컵에선 ‘특파원’…스포츠가 인플루언서를 부르는 이유

인플루언서를 활용하는 스포츠 대회는 US오픈만이 아닌데요. FIFA와 틱톡은 2026 북중미 월드컵을 앞두고 4개 대륙 11개국에서 활동하는 30명의 ‘크리에이터 특파원’을 선발했습니다. 이들은 선수단 도착과 훈련, 기자회견, 워밍업부터 개최도시의 팬 문화까지 영상으로 전달했죠.

유튜브도 합산 구독자 3억5000만 명이 넘는 글로벌 크리에이터들을 월드컵 현장에 보냈습니다. 축구는 경기 중 함성과 이동, 휴대전화 촬영이 자연스러워 크리에이터의 활동이 선수에게 미치는 영향이 테니스보다 적죠. 같은 홍보 전략이라도 종목의 관람 문화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이유입니다.

NBA(미국프로농구)는 크리에이터에게 코트사이드 취재 기회와 2만5000시간이 넘는 공식 경기 영상, 인공지능 편집 도구를 제공하는데요. 2023-2024시즌에는 100명 이상의 크리에이터가 만든 콘텐츠가 6억5000만 회 넘게 조회됐죠.

F1의 성과는 더 큽니다. 2025년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에 참여한 크리에이터 1200여 명이 약 5000건의 게시물을 만들었고, 노출 횟수는 18억 회에 달했는데요.

수억 명에게 도달하는 짧은 영상과 게시물은 스포츠 단체가 인플루언서를 포기하기 어려운 이유죠. 경기뿐 아니라 개최도시와 음식, 패션, 후원 상품까지 함께 노출할 수 있고 그 효과도 조회수와 공유 수치로 곧바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인스타그램 캡처 (@annalisedalins_))


팬을 데려왔지만, 팬을 밀어냈다…조회수의 두 얼굴

2026 호주오픈에는 260명의 인플루언서와 크리에이터가 참여했는데요. 이들이 만든 콘텐츠는 전년보다 95% 늘어난 3억4800만 회의 노출을 기록했죠. 대회 측은 전용 라운지를 마련하고 게시 실적에 따라 백스테이지 투어와 주요 경기 좌석 등의 혜택을 제공했습니다.

반대편에서는 기존 팬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요. 스탄 바브링카(스위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햇볕 아래에서 5시간을 기다린 팬이 있는가 하면, 일부 인플루언서가 좋은 좌석에서 제품 사진만 찍고 떠났다는 목격담도 나왔습니다. 새로운 팬을 불러오기 위한 초청이 오랫동안 대회를 지켜온 팬에게는 특혜로 비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크리에이터에게도 마냥 좋은 조건은 아닙니다. 한 참가자는 전용 라운지를 이용하려면 대회 관련 편집 영상 약 20개를 제작해야 했는데요. 주최 측은 보수와 여행 경비를 지급하지 않고 게시 실적에 따라 좌석과 출입 혜택을 제공했죠. 대회에는 적은 비용으로 홍보물을 얻는 방법이지만, 크리에이터에게는 불확실한 보상을 전제로 한 제작 노동이 될 수 있습니다.

수억 번의 노출이 실제 팬 증가로 이어졌는지도 분명하지 않죠. 같은 이용자의 반복·중복 노출이 포함될 수 있고, 음식이나 패션 영상을 본 사람이 경기 시청과 티켓 구매로 이어졌는지는 별도 검증이 필요하기 때문인데요.

2024 파리올림픽에서도 공식 크리에이터 프로그램과 ‘팀 USA 크리에이터스’가 큰 조회수를 기록했지만, NBC가 파리에 보낸 외부 크리에이터 27명은 기대만큼 주목받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경기 촬영이 제한된 상황에서 외부 인플루언서의 홍보물보다 선수들이 직접 공개한 선수촌과 경기 준비 영상이 더 큰 관심을 끌었죠.

취재와 광고의 경계도 과제로 남습니다. 좌석과 식사, 특별 출입 혜택을 받은 콘텐츠가 독립적인 취재인지 대가성 홍보인지 이용자가 알기 어렵기 때문인데요. 다만 전문성을 갖춘 스포츠 크리에이터까지 모두 ‘공짜 표를 받은 인플루언서’로 묶는다면 기존 언론 밖에서 성장한 새로운 스포츠 미디어의 역할까지 부정하게 될 수 있죠. 결국 필요한 것은 배제가 아니라 명확한 표시와 관람 수칙, 초청 주체의 관리입니다.


▲독일의 알렉산더 츠베레프가 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USTA 빌리진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에서 열린 US오픈 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16강전에서 이탈리아의 루치아노 다르데리를 상대로 공을 받아치고 있다. (AFP/연합뉴스)

▲전 미국프로농구(NBA) 올스타 포인트가드이자 현 밀워키 벅스 감독인 닥 리버스가 8월 15일(현지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서 열린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문을 열었다면 규칙도 알려줘야

인플루언서는 이미 스포츠의 새로운 중계자가 됐는데요. 월드컵에서는 특파원으로 뛰고, NBA에서는 공식 경기 영상을 편집하며, 올림픽에서는 선수촌의 일상을 전하죠.

스포츠계가 인플루언서를 활용하는 흐름은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남은 과제는 경기와 관람을 해치지 않는 선을 분명히 정하는 일입니다.

고프의 말처럼 레드카펫에는 레드카펫의 옷차림이 있고 테니스장에는 테니스장의 예절이 있는데요. 새로운 손님에게 문을 열었다면 그곳의 규칙까지 알려주는 것이 대회와 초청 브랜드의 몫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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