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V링크 퓨전 생태계에 편입
커스텀 AI칩 엔비디아와 연결
PCㆍ데이터센터ㆍ車 동맹 확대

AI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엔비디아가 대만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미디어텍에 35억달러(약 4조8000억원)를 투자한다. 구글과 아마존, 메타 등 빅테크가 극단적인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자체 AI칩 개발에 속속 착수한 가운데 엔비디아는 이런 흐름을 억제하는 대신 자체 칩을 개발해도 칩끼리 소통망은 엔비디아의 기술을 쓰라는 의지로 풀이된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대만 미디어텍이 발행하는 해외 전환사채(CB) 39억달러 가운데 89.7%인 35억달러를 인수하기로 했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도 일부 투자에 참여했으나 구체적인 규모는 공개하지 않았다.
투자의 핵심은 엔비디아의 고속 반도체 연결 기술인 ‘NV링크 퓨전’이다. 미디어텍은 이를 도입해 고객사가 자체 개발한 AI 가속기 등 맞춤형 반도체(XPU)를 엔비디아의 대규모 데이터센터 시스템에 연결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이번 지분투자는 AI 반도체 경쟁구도가 변화하는 시점에서 적잖은 의미를 지닌다고 로이터는 분석했다. 그동안 AI 인프라 경쟁은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최근 구글과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등 주요 빅테크는 극단적인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자체 AI 반도체 개발에 착수했다. 이들의 별도 칩이 엔비디아의 시장 점유율을 위협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엔비디아는 이런 흐름에 맞서 커스텀 칩을 배척하기보다 자사 생태계로 흡수하는 전략을 택했다. 예컨대 고객사가 엔비디아 GPU 대신 자체 AI 반도체를 사용하더라도 칩과 칩 사이의 소통 인프라는 엔비디아의 제품과 기술을 활용하라는 의미다. 이를 위해 대만 팹리스 지분투자는 물론 AI 생태계 전반에 걸쳐 촘촘하게 자본을 배치 중이라고 인베스팅닷컴은 분석했다.
AI 반도체 시장에서 GPU 자체의 점유율이 떨어지더라도 AI 데이터센터 전체의 기술 표준을 장악하면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엔비디아의 전략이다. 앞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자사를 단순한 GPU 제조사가 아닌 ‘AI 인프라 기업’으로 규정한 것도 이런 배경이 서려 있다.
엔비디아와 미디어텍은 6월 AI 기능을 노트북과 데스크톱으로 확대하기 위한 ‘RTX 스파크’ PC용 칩을 공동 개발했다. 앞으로 소비자용 PC와 AI 개발자용 컴퓨터는 물론 AI 기반 소프트웨어 자동차(SDV) 플랫폼까지 협력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미디어텍에도 이번 협력은 사업구조를 바꿀 기회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주력이었던 미디어텍은 최근 AI 데이터센터용 커스텀 반도체 시장으로 빠르게 영역을 넓히고 있다. 7월에는 AI 사업 확대 등을 위해 약 50억달러 규모의 자금조달 계획도 승인했다.
이번 투자는 AI 반도체 경쟁의 전선이 개별 칩의 성능을 넘어 플랫폼과 연결 기술, 자본력 경쟁으로 확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로이터는 평가했다. 글로벌 주요 빅테크가 자체 반도체를 개발해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려 하자 엔비디아는 역으로 이들 칩이 작동하는 데이터센터의 ‘길목’을 장악하는 전략에 나섰다는 것이다. GPU를 팔아 AI 시대의 문을 연 엔비디아가 이제는 그 문을 지나는 모든 반도체가 자사의 기술 표준을 거치도록 AI 생태계의 외연을 넓히고 있는 셈이다.
미국 투자 전문매체 마켓워치는 헨디 수산토 가벨리펀드 매니저의 분석을 인용해 “이번 투자와 협력은 커스텀 XPU와 엔비디아의 범용 AI 생태계가 시너지를 내며 공존할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라며 “미디어텍은 엔비디아 생태계를 활용해 커스텀 칩 사업을 확대하고 엔비디아는 새로운 고객과 플랫폼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상호 윈윈”이라고 짚었다.
다만 엔비디아가 자사 생태계에 참여하는 기업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면서 AI 산업의 ‘순환 금융’ 우려도 커지고 있다. 엔비디아의 자금을 받은 기업이 다시 엔비디아 기술과 제품을 채택해 매출과 기업가치를 함께 끌어올리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황 CEO는 이러한 시각에 대해 블룸버그통신 인터뷰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사업을 하고 우리는 우리의 사업을 하기 때문에 순환 구조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조 티게이 래셔널에쿼티아머펀드 포트폴리오 매니저도 “고객사에 직접 자금을 대는 것보다는 순환성이 약하지만 엔비디아가 재무 능력을 활용해 생태계 성장을 가속하는 구조”라고 분석했다.
이번 투자가 전환사채 인수 방식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엔비디아가 당장 미디어텍 지분을 취득하는 것은 아니지만 향후 채권을 주식으로 바꿀 수 있다. 미디어텍의 AI 반도체 사업과 NV링크 퓨전 생태계가 성장해 주가가 오르면 엔비디아가 전략적 성과뿐 아니라 재무적 이익까지 얻을 수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