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펀드 장착한 해외 PE, 아시아 M&A 영향력 확대
원화 약세에 '할인 효과'…외국계 PE 공세 확대 국면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서는 고환율 국면 속에서, 수십조원의 '메가 펀드' 실탄을 장전한 외국계 사모펀드운용사(PE)들이 국내 조 단위 인수합병(M&A) 시장을 주도 중이다. 국내 토종 PE들이 최근 중소형(미드캡) 거래(딜)를 중심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과 달리, 자본력과 환차익 우위를 앞세운 글로벌 큰 손들이 대형 매물을 독식하는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는 모양새다.
11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PE 칼라일그룹은 청호나이스와 마이크로필터, 엠씨엠(MCM) 등 계열사 지분 모두를 인수했다. 거래 가격은 1조원대 초반으로 알려졌다. 이번 투자는 칼라일의 아시아 지역 투자 펀드인 '칼라일 아시아 파트너스'가 운용하는 펀드를 통해 집행됐다.
칼라일뿐 아니라 최근 시장의 이목이 쏠린 대형 거래 상당수는 외국계 PE가 주도 중이다. 스웨덴계 글로벌 PE EQT파트너스는 전사적자원관리(ERP) 기업 더존비즈온을 약 1조3000억원에 인수했고,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는 삼성SDS가 발행한 1조220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CB)를 인수하는 구조화 투자를 단행했다. 대형 거래에서 외국계 자본의 존재감이 갈수록 커지는 분위기다.
시장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글로벌 PE들이 최근 잇달아 대규모 펀드 결성에 성공하면서 투자 여력이 한층 확대됐기 때문이다. 최근 블랙스톤은 약 20조원(131억달러) 규모의 아시아 투자 펀드를 조성했으며 EQT 역시 약 24조원(156억달러) 규모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대 규모의 블라인드펀드 결성을 마무리했다. KKR도 약 4조원(25억달러) 규모의 아시아 사모 크레딧펀드를 조성했다.
특히, 고환율 환경은 달러 기반 자금을 운용하는 글로벌 PE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동일한 달러 자금으로도 과거보다 더 많은 국내 자산을 매입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 환율이 상승할수록 해외 투자자 입장에서는 한국 기업의 달러 기준 매입 가격이 낮아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과거 글로벌 PE와 입찰에서 경쟁했던 한 국내 PE 관계자는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외국계 PE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며 "원·달러 환율이 1300원일 때도 불리한 느낌을 받았는데, 1500원까지 넘어선 상황에서는 가격 경쟁 자체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글로벌 PE들이 한국 시장을 주목하는 배경에는 환율 외에도 구조적인 저평가 매력이 자리 잡는다. 중국 경기 둔화와 지정학적 리스크가 지속되는 가운데 일본은 기업가치가 상당 부분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한국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제조업과 정보기술(IT) 기업을 다수 보유하고 있음에도 상대적으로 낮은 밸류에이션(기업가치)이 유지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KKR에 따르면 현재 한국 증시 상장 기업의 약 70%는 여전히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미만으로 거래 중이다. 이에 KKR은 한국 기업의 구조 개혁과 지배구조 개선 흐름을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매력적인 투자 기회 가운데 하나로 평가했다.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정책과 주주행동주의 확산, 비핵심 자산 매각 등이 이어지면서 향후 기업가치 재평가 여력이 충분하다는 판단이다.
대기업들의 사업 재편 움직임도 글로벌 PE의 투자 확대를 뒷받침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국내 주요 그룹들은 핵심 사업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면서 비주력 사업과 계열사를 매각 중이다. 이 과정에서 조 단위 규모의 카브아웃(사업부 분할) 매물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으며, 풍부한 자금력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춘 외국계 PE들이 유력한 인수 후보로 부상했다.
반면, 국내 PE들은 여전히 자금 조달 환경 악화를 품고 있다. 고금리 여파로 인수금융 비용 부담이 커진 데다 국민연금과 공제회 등 주요 기관투자자(LP)들의 출자 기조도 이전보다 보수적으로 변했다. 최근 출자 사업으로 진행 중인 국민성장펀드 역시 일부 운용사에 자금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중소·중견 PE들의 펀드레이징 부담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국민성장펀드에 선정되지 못한 운용사의 경우 신규 자금 확보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IB업계 관계자는 "고금리와 자금 조달 부담으로 국내 PE들이 중소형 매물 확보에 집중하는 사이 외국계 PE들은 메가 펀드를 바탕으로 대기업 계열사 매각과 조 단위 거래를 적극 공략 중이다"며 "고환율과 풍부한 실탄, 한국 시장의 저평가 매력이 맞물리면서 글로벌 PE의 국내 투자 확대 흐름은 하반기에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