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사들, 추정치 아닌 실측치 원한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가 더 이상 ‘착한 기업’ 경쟁이 아닌 데이터와 검증 중심의 공시 경쟁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의 디자인이나 사회공헌 활동보다, 실제 수치의 정합성과 외부 검증 체계가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분위기다. ESG가 선언과 캠페인 중심의 영역에서 투자·수출·자금조달과 직결되는 ‘숫자 경쟁’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 규제가 강화되면서 자동차·배터리·반도체 업계를 중심으로 ESG 대응 부담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비롯해 글로벌 완성차·빅테크 기업들의 공급망 관리 요구 수준이 높아지면서 단순한 ESG 보고서 제출만으로는 대응이 어려워졌다는 분석이다. 해외 고객사들이 탄소배출량과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 공급망 관리 수준 등을 세부적으로 요구하면서 기업 내부에서도 ESG를 홍보·사회공헌(CSR) 조직이 아닌 최고재무책임자(CFO)·재무·기업설명(IR) 조직 중심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최근 기업들은 협력사 온실가스 배출량과 원재료 조달 이력, 인권·안전관리 체계 등 공급망 전반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관리해야 하는 부담까지 안게 됐다. 특히 글로벌 기업들이 Scope3(공급망 간접배출) 관리 비중을 확대하면서 국내 협력사들 역시 ESG 데이터 제출 요구를 받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제 ESG는 홍보팀이 예쁜 보고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공급망 전체 데이터를 관리하는 문제로 바뀌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19일 회계업계에서는 지속가능성 보고서 역시 향후 재무제표처럼 감사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왔다. ESG 데이터 검증 시장이 본격 성장 국면에 진입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글로벌 회계법인들을 중심으로 ESG 인증·검증 조직 확대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기업들이 공개하는 탄소배출량과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 등이 투자 판단과 직결되면서 향후 재무정보 수준의 검증 체계가 요구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한 대기업 ESG 담당자는 “과거에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의 디자인이나 형식, 사회공헌 활동을 얼마나 보기 좋게 정리했는지가 중요했다면, 최근에는 데이터 산출 근거와 외부 검증 여부를 더 중점적으로 확인하는 분위기”라며 “해외 고객사들도 단순 활동 내용보다 실제 수치와 검증 체계, 공급망 관리 수준까지 요구하는 사례가 빠르게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공급망 규제가 강화되면서 협력사 대상 탄소배출량,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 인권·안전관리 체계 등을 세부적으로 요청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며 “이에 따라 원청 기업의 ESG 대응뿐 아니라 협력사 대상 지원 및 관리 체계 구축 중요성도 함께 확대되고 있으며, 결국 ESG는 숫자와 데이터 신뢰성의 문제라는 인식이 기업 내부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실제 공급망 데이터의 신뢰성 확보가 ESG 공시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보미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ESG 공시 제도화에 따른 공급망 데이터 신뢰성 확보를 위한 방안’ 보고서를 통해 “중소 협력사가 데이터를 제출하지 않으면 대기업은 대부분을 추정치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라며 “유예 및 제외 조치가 대기업 연결 기준 공시 데이터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또 “중소기업이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아도 산업 평균 추정치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실제 탄소 감축이나 실측 데이터 관리 유인이 약화될 수 있다”며 “산업별 특성에 맞는 데이터 수집 체계와 실측 데이터 공개 유인 체계를 정교화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ESG 공시 의무화가 확대될수록 단순 선언형 ESG 전략보다 데이터 관리 역량 자체가 기업 경쟁력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 내에서 검증 가능한 데이터를 요구하는 흐름이 강해지면서 향후 ESG 대응이 회계·감사 영역과 더욱 밀접하게 결합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ESG가 ‘좋은 일을 얼마나 했는가’보다 ‘숫자를 얼마나 정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가’를 따지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의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