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애플이 자체 설계 칩의 생산 일부를 인텔에 맡기기로 예비 합의에 도달했다고 보도했다. 2006년부터 14년간 이어졌던 맥용 프로세서 협력이 결별로 끝난 지 6년 만의 재결합이다. 그러나 이번 결합은 과거와 차원이 다르다. 애플이 대만 TSMC라는 최상의 파트너를 두고 굳이 파운드리 경쟁력이 약화된 인텔과 재결합한 배경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집요한 압박이 자리하고 있다. '기술 격차가 지분 10% 확보만으로 해소되겠느냐'는 시장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빠르게 도출됐다. 기술 격차는 그대로지만, 고객은 시장의 효율이 아닌 정치적 역학이 결정했다. 'Pay-me Capitalism'의 본질이 시장을 정치로 재정의하는 데 있음이 더욱 또렷해진 셈이다.
10%대 인텔 지분을 쥐고 사실상 '국영기업'에 가까운 통제권을 행사하는 트럼프 행정부는, 엔비디아와 소프트뱅크의 대규모 투자 유치, 일론 머스크의 테라팹 프로젝트 합류에 이어 애플이라는 확실한 '일거리'까지 인텔에 안겨주었다.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국가 안보와 제조업 부활이라는 정치적 대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MAMA(Make America Manufacture Again)' 구호는 이제 글로벌 빅테크의 공급망 지도를 강제로 다시 그리는 거대 권력이 됐다.
주목할 점은 이 거대한 지각변동 속에서 한국 반도체의 심장인 삼성전자의 기회와 위기가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인텔과 손잡은 애플은 삼성전자의 텍사스 테일러 공장도 방문해 협력을 논의했다. 다공급망 전략을 통해 특정 기업에 쏠리는 정치적 압박을 분산하려는 포석이다. 이는 'Pay-me Capitalism'의 핵심 조건이 특정 기업 살리기가 아닌 '미국 내 제조(Made in USA)'에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삼성이 미국 땅에 짓고 있는 공장은 이제 단순한 생산 시설을 넘어, 거대 민간 자본과 국가 권력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전략적 안전 자산'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삼성을 가로막는 가장 큰 위협은 나라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글로벌 반도체 지형도가 요동치고 거대 고객사가 안정적 공급망을 찾아 삼성의 문을 두드리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노조는 총파업을 예고했다. 심지어 노조 내부에서는 반도체 부문에 편중된 성과급을 둘러싼 노노(勞勞) 갈등마저 불거지며 파업의 명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파운드리 사업은 고객과의 신뢰가 생명이다. 단 하루의 라인 정지로도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고객의 신뢰가 단숨에 무너질 수 있다. 국가 간 팔 비틀기가 자행되는 무자비한 전쟁터에서, 스스로 톱니바퀴를 멈추는 행위는 국가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Pay-me Capitalism'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상수가 되었다. 미국은 지분 확보로, 한국은 '소버린 AI' 같은 민관 협력으로 각자의 생태계를 구축하며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접근법은 달라도, 반도체와 AI가 더 이상 시장 논리에만 맡겨둘 수 없는 핵심 국가 전략 자산이라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반도체와 AI 덕에 코스피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8000선 돌파를 목전에 둔 개국 이래 최대 호황기다. 모두가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긴박한 시점이다.
그런데도 자신 있다면 가보라. 멈춰 세운 라인 위로 인텔의 공정이 돌아가고, 삼성의 숙련된 엔지니어들이 경쟁사의 헤드헌팅 명단에 오르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라. 한 번 무너진 공급망의 신뢰를 복구하기 위해 얼마나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그 결과가 우리 경제의 미래에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올지 감당할 수 있다면 그 길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라. '5월엔 팔고 떠나라(Sell in May)'라는 증시의 오랜 격언은 스스로 불러온 자승자박의 뼈아픈 결과로 입증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