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너머] 무가치함과 싸우는 인터넷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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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피킹(Cherry Picking)은 인터넷전문은행의 사명이 아니다.” 최근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의 이 한마디는 커다란 해일이 됐다. 달콤한 고신용자 대출에만 치중하지 말고 본연의 설립 취지인 중저신용자 대출이라는 ‘쓴 약’을 더 삼키라는 강력한 경고다. 업계에서는 중저신용자 대출 목표 비율이 크게 상향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인터넷은행은 태생부터 ‘포용의 아이콘’이라는 과제를 안고 출범했다. 기존 은행 문턱을 넘지 못했던 이들을 제도권 금융으로 끌어들이라는 특명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출범 초기 데이터는 부족했고 이익 체력은 허약했다. 생존을 위해 고신용자 대출과 정책보증대출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이를 ‘체리피킹’이라 낙인찍는 것은 당시의 절박했던 성장통을 간과한 처사다.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결핍을 메우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쓴다. 인터넷은행 역시 시장에서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분투해 왔다. 기존 금융권이 외면했던 차주들을 데이터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숫자로 가치를 증명해 온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전용 무대조차 사라지고 있다. 정부가 포용금융을 지속 강조하자 시중은행과 지방금융, 심지어 캐피탈사까지 자체 신용평가모형(CSS)을 들고 중금리 대출 시장에 뛰어들고 있어서다.

거대 자본과 오프라인 영업망을 앞세운 기존 금융권의 역공 속에서 인터넷은행은 건전성 관리와 규제 준수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인터넷은행의 출범 목적은 소외된 차주를 포용하겠다는 것이었지, 은행업의 본질인 건전성을 무시하라는 의미는 아닐테니 말이다.

문제는 가계대출의 통로가 막히고 중금리 시장마저 레드오션이 된 상황이다. 포용의 사명을 지속하려면 결국 더 넓은 '생산적 금융'으로의 영토 확장이 필수적이다. 정부는 연일 은행권에 기업대출 확대를 주문하며 산업 생태계 전반에 자금이 흐르길 원하지만 정작 인터넷은행은 이 흐름에서 철저히 소외돼 있다. 비대면 영업의 한계와 경직된 규제에 갇힌 인터넷은행은 중소기업·법인 대출이라는 드넓은 바다를 바라만 볼 뿐이다.

손발을 묶어놓고서 끊임없이 혁신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가혹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일방적인 압박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 환경이다. 혁신의 데이터가 우리 경제의 실핏줄까지 닿게 하려면 규제의 빗장을 조금이라도 열어줘야 한다. 성장판이 닫힌 메기는 더 이상 시장을 자극할 수도, 포용을 지속할 수도 없다. 이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도록 기회의 문을 열어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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