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논단_전하진 칼럼] 에너지 정책 대전환 추진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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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중형 전력공급망 한계 직면
에너지안보 시대 분산지능망이 답
국가과제 선정해 인프라 구축해야

영국의 에너지 스타트업 기업 옥토퍼스 에너지(Octopus Energy)는 설립된 지 10년 만에 약 12조원의 기업가치를 가진 영국 최대 가정용 에너지 공급자로 올라섰다. 그 핵심에는 인공지능(AI) 플랫폼 크라켄(Kraken)이 있다.

전기요금 청구부터 전기차 충전, 수요 반응, 분산자원 제어까지 통합 관리하는 크라켄은 에너지 사용과 저장, 거래를 데이터 기반으로 실시간 최적화한다. 2025년 말 약 5000만 개 계정이 사용 중이고, 18개국에서 운영 중이라고 한다. 옥토퍼스의 성공은 전력망의 지능화가 에너지 산업의 새로운 경쟁력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신재생에너지 100GW(기가와트) 보급, 햇빛마을, 지산지소(地産地消·지역 생산, 지역 소비) 정책은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어 방향 자체는 옳다. 그러나 한 가지 핵심이 빠져 있다.

신재생에너지를 담아낼 전력망의 철학이 여전히 중앙집중형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햇빛마을이 한전과 연결된다는 것은 기존의 전력망에 또 다른 발전원이 추가된다는 의미이며, 진정한 분산지능망이라고 볼 수 없다.

현재 신재생에너지는 송전망 포화로 출력제한이 빈번하다. AI 데이터센터·반도체 공장 등 대규모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송전망 확충과 대규모 발전소 건설은 주민 반대와 수년의 공사 기간을 감안할 때 속도를 내기 어렵다.

글로벌 공급망 불안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에너지 안보를 중앙집중형 망 하나에만 의존하는 것은 구조적 취약성을 방치하는 것이다.

해법은 과감한 전력망의 이원화이다. 반도체·AI 데이터센터처럼 안정적 대용량 전력이 필요한 산업은 국가기간망을 담당하는 한전이 기존 방식으로 책임진다. 그리고 지역 자립과 회복력을 높일 수 있도록 신재생에너지 기반의 분산지능망을 별도 인프라로 구축한다.

이 망이 구축되어야 진정한 ‘지산지소’가 이루어질 수 있다. 이렇게 두 망이 역할을 나눌 때 국가 에너지 주권은 더 공고해진다. 신규 발전소나 송전망 건설 예산을 분산지능망으로 전환하면 추가 예산 없이 새로운 망 구축이 가능하다.

분산지능망은 에이전틱 AI(Agentic AI)의 등장으로 이제 현실적 설계가 가능 해졌다. 마을, 건물, 산업단지, 전기차, 소규모 발전설비가 각각 하나의 지능적 노드가 될 수 있다. 중앙의 명령을 기다리는 수동적 말단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해 생산·저장·소비·거래를 실시간으로 수행하는 능동적 단위가 되는 것이다.

이 자립 기반의 기본 단위를 살림셀(SalimCell)이라고 부른다. 재생에너지, 에너지저장장치(ESS), 전기차, 스마트 수요관리 기술이 결합된 살림셀은 주민과 마을, 건물과 소상공인 모두를 생산자이자 소비자이자 판매자, 즉 프로슈머로 전환시킨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도 이런 분산지능형 구조 안에서 다뤄질 때 비로소 약점이 아니라 유연성의 원천이 된다. 수만 개의 살림셀이 잉여자원을 정교하게 교환하며 최적화되는 분산지능망은 새로운 에너지 시장의 설계도다.

분산지능망의 시장 잠재력은 국내에 그치지 않는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30년까지 전 세계 분산에너지자원(DER) 시장은 연간 1000억달러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에너지 수급 불안이 심화될수록 모든 국가가 에너지 주권 확보에 나설 것이고, 살림셀과 분산지능망은 즉시 적용 가능한 솔루션으로 부상할 수 있다. 특히 중앙집중형 전력 인프라가 취약한 신흥국 시장에서는 살림셀이 최초의 안정적 전력망 모델이 될 수 있다.

옥토퍼스의 성공은 기존 중앙집중식 망을 지능화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 완전한 분산지능망을 구축함으로써 다음 단계의 에너지 산업을 선점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보유한 반도체·배터리·AI·통신 역량은 살림셀 생태계를 설계하고 수출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정부는 재생에너지 보급 목표와 함께 분산지능망을 별도의 국가 인프라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 살림셀 실증단지 조성, 분산자원 거래 제도화, 에이전틱 AI 기반 자율거래망 구축을 위한 규제 특례와 금융 지원이 병행되어야 한다.

기술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지금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투자와 제도 설계다. 에너지 전환의 과실을 누가 먼저 거두느냐는 결국 지금 어디에 투자하느냐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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