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역삼동 구글코리아 사옥 내부 모습. (연합뉴스)
최근 국내 주식 시장을 뜨겁게 달구던 반도체 대장주들이 갑작스러운 암초를 만났습니다. 25일 오전 유가증권시장에서 SK하이닉스는 전 거래일 대비 3.42% 내린 96만 1000원에, 삼성전자는 2.54% 하락한 18만 4200원에 거래되며 동반 약세를 보였습니다. 간밤 뉴욕증시에서도 마이크론(-3.40%)을 비롯해 샌디스크, 웨스턴디지털, 시게이트 등 반도체 관련 종목들이 일제히 하락하며 업종 전반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전 세계 반도체 투자심리를 꽁꽁 얼어붙게 만든 배경에는 구글이 새롭게 공개한 인공지능(AI) 기술, '터보퀀트(TurboQuant)'가 있습니다.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 알고리즘 하나가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길래 굳건하던 우리 반도체 시장에 이토록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인지, 그 원리와 향후 전망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터보퀀트의 원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AI가 어떻게 인간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나가는지 그 과정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대화형 AI와 긴 문맥의 이야기를 나눌 때, AI는 단순히 현재의 질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앞서 우리가 주고받았던 모든 질문과 답변을 임시로 기억해 둡니다. 이 핵심적인 기억 공간을 전문 용어로 'KV 캐시(Key-Value Cache)'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사용자와의 대화가 길어지고 처리해야 할 문서나 데이터가 방대해질수록, 이 임시 기억을 담아둘 거대한 메모리 공간이 기하급수적으로 필요해진다는 점입니다.
구글의 터보퀀트는 바로 이 거대한 기억 공간의 낭비를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혁신적인 '데이터 압축 알고리즘'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겨울이 지나고 부피가 큰 솜패딩을 옷장에 보관할 때 '진공 압축팩'에 넣어 공기를 빼고 크기를 쫙 줄이는 것과 완벽히 같은 원리입니다. 터보퀀트를 시스템에 적용하면 AI 모델을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메모리 사용량을 기존의 6분의 1 수준으로 대폭 줄일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메모리 부피를 극한으로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AI가 질문의 맥락을 파악하고 정확한 답변을 내놓는 성능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무거운 데이터의 짐을 덜어낸 AI가 데이터를 불러오고 처리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훨씬 가볍고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23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 코스피 등 시황이 표시되고 있다. 신태현 기자 holjjak@
이처럼 혁신적이고 훌륭한 소프트웨어 기술이 정작 주식 시장에서는 왜 대형 악재로 돌변했을까요. 그 해답은 현재 글로벌 AI 산업의 수익 구조에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글로벌 반도체 선도 기업들은 AI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를 독점하다시피 공급하며 천문학적인 수익을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AI의 선두 주자인 구글이 앞장서서 '이제 AI를 돌릴 때 값비싼 메모리를 예전처럼 무한정 많이 쓰지 않아도 충분히 똑똑하게 작동시킬 수 있다'는 기술을 공식적으로 발표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은 곧바로 투자자들의 불안 심리를 자극했습니다. 시장 참여자들은 당연히 향후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거대한 AI 데이터센터를 새롭게 구축하거나 확장할 때, 서버에 탑재되는 메모리 반도체의 절대적인 수량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AI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고부가가치 메모리 반도체가 끝없이 팔려나갈 것이라는 강력한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은 격입니다. 결과적으로 구글의 터보퀀트 발표는 데이터센터향 메모리 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둔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이는 곧바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향한 투자심리를 급격히 얼어붙게 만드는 직격탄이 되었습니다.
상용화는 아직 논문 단계… 장기적으론 '반도체 대중화' 촉매제
▲반도체 공장 내부 관련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그렇다면 구글의 새로운 알고리즘이 당장 내일부터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 있을까요. 업계에서는 이번 이슈가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인 위기라기보다는 시장의 과열을 식히는 단기적인 충격에 가깝다고 진단합니다. 터보퀀트는 현재 학술적인 가능성을 입증한 논문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무리 실험실에서 완벽하게 증명된 뛰어난 이론이라 할지라도, 이를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거대한 글로벌 데이터센터 산업 현장에 즉각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기존의 다양한 하드웨어 장비들과 완벽하게 호환되는지, 대규모 트래픽이 몰렸을 때 예상치 못한 시스템 오류는 없는지 확인하는 까다로운 검증 및 테스트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제 대규모 상용화가 이루어져 시장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까지는 아직 꽤 긴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이 압축 기술이 반도체 시장에 새로운 도약을 가져올 더 큰 호재가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시각도 존재합니다. 터보퀀트 기술 도입으로 AI 운영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서버 유지 비용이 획기적으로 저렴해진다면 어떨까요. 지금까지는 비용 문제로 감히 고성능 AI 도입을 망설이던 수많은 중소규모 기업과 스타트업들이 일상 곳곳의 서비스에 앞다퉈 AI를 접목하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전 세계에서 24시간 가동되는 AI 서비스의 총량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압축 기술로 인해 개별 기기당 들어가는 메모리 비중은 다소 줄어들지 몰라도, 전체 파이가 커지면서 이를 훌쩍 뛰어넘는 더 거대한 반도체 절대 수요가 새롭게 창출될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