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 벤치마크 브렌트유와 괴리 확대
아시아 정유업계 ‘원유 쟁탈전’…노르웨이·러시아까지 가격 급등
필리핀 “연료 45일분”…에너지 비상사태 선언

24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현재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할 수 있는 일부 중동산 원유는 배럴당 160달러 수준에 거래되고 있다. 이는 브렌트유와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등 주요 벤치마크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전쟁 이후 특정 원유 가격이 벤치마크를 압도하는 ‘가격 왜곡’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 가격 상승 속도도 이례적이다. 중동산 벤치마크 역할을 하는 두바이유는 올해 들어서만 150% 이상 급등했다. 반면 같은 기간 브렌트유 상승률은 64%에 그쳐 괴리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 현재 브렌트유는 WTI보다 배럴당 12달러 높은 프리미엄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산 원유가 아시아 수요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운송 비용이 비싸다는 점, 그리고 미국의 수출 제한 가능성까지 반영된 결과로 분석된다.
시장에서는 특히 아시아 지역의 수급 불균형이 심각하다고 보고 있다. 아시아 정유업체들이 경유와 항공유 생산에 필요한 중동산 고유황 원유를 확보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대체 물량을 찾아 나서면서 노르웨이, 러시아, 콜롬비아, 미국 일부 지역 원유 가격까지 동반 상승하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유럽으로 향하던 물량이 아시아로 재배치되는 등 글로벌 원유 흐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이 같은 공급 충격은 단순한 가격 상승을 넘어 구조적인 문제로 확산할 전망이다. 전쟁 이전 하루 약 2000만 배럴에 달하던 호르무즈 해협 통과 물량 가운데 현재 약 1600만 배럴이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글로벌 원유 공급의 약 20%에 해당하는 규모다. 사우디아라비아 송유관을 거친 물량과 국제에너지기구(IEA) 회원국들의 전략비축유 방출로 보완이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하루 1000만 배럴 안팎의 공급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문제는 이러한 충격이 시차를 두고 전 세계로 확산된다는 점이다. 원유는 생산지에서 소비지까지 복잡한 물류·금융 시스템을 거치기 때문에 현재의 가격 급등이 수주 또는 수개월 뒤 소비자 가격에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호르무즈 해협 운항이 조속히 재개되지 않을 경우 현재의 고유가가 미국과 유럽 시장으로 본격적으로 퍼질 수밖에 없다.
에너지 시장의 불안은 이미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필리핀은 이날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연료 공급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필리핀은 원유 수입의 9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현재 비축량은 약 45일 수준에 불과하다. 최근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연료 공급 차질 우려가 커졌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에너지 안보가 위협받고 있으며 필수 물자의 공급에도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범부처 대응 기구를 구성해 연료와 식량, 의약품 공급을 유지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항공기 운항 중단 가능성까지 언급되는 등 위기감이 고조됐다.
시장에서는 이번 사태가 단기적인 가격 급등을 넘어 글로벌 경제 전반에 장기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중동 지역의 긴장이 장기화하면 원유 공급망 재편과 함께 물가 상승 압력이 지속되며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한층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