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예교수/공법학
나토마저 부정적…동참 명분 없어
지원 의지 밝히되 ‘한계’ 제시해야

세계의 화약고 중동이 불타고 있다. 시대착오를 의심케 하는 악당들이 세계를 공포와 충격에 빠뜨린다. 주권, 인권, 경제 파국은 안중에 없다. 집속탄과 백린탄 같은 악마의 무기들까지 동원하여 상호 확증 파괴를 방불케 하는 지경으로 치닫는다. 종말의 아포칼립스가 지구촌 하늘을 뒤덮고 있다.
사람들 목숨이, 학교에서 재잘대며 수업을 하던 어린이들이든 아무 도움도 없이 내팽개쳐진 노인들이든, 내일을 두려워하며 잠자리에 든 주민들이든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학살된다. 이것은 선악의 대결이 아니다. 끝을 모르는 악의 추악한 참극이고 누적 확장의 악순환이다.
인권을 짓밟다 자유를 원하는 시민들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정부, 그 정부가 미사일이나 핵으로 자신의 실존을 위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다른 정부, 에너지와 경제, 그리고 자신의 패권을 위해 남의 나라 정권, 지도자를 척살하는 또 하나의 정부, 모두가 다 악과 더 큰 악들이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정권이라도 그 나라 주권을 무시하고 침공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불법과 불법의 끝없는 싸움을 단죄할 법정은 없다. 국제법은 중동의 모래바람에 휩쓸려 자취조차 찾을 수 없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힘과 힘의 잔혹한 대결을 심판할 역사의 법정은 요원하다. 스님들이 전쟁과 살생을 멈추라며 오체투지를 해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 반대를 외쳐도 소용이 없다.
이 전쟁에 승자는 없다. 만일 승리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라 더 큰 악, 더 센 그리고 더 오래 버티는 악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규범 기반(rule-based) 국제질서를 향한 그동안의 행보는 파탄지경이다. 선과 악이 뒤섞여 분간조차 안 되는 혼돈의 세상이다. 이 무질서와 혼란이 새로운 질서라면 질서겠지만, 사필귀정, 선악 대결의 해피엔딩에 익숙한 사람들은 전에 겪지 못한 인지부조화로 충격과 공황을 벗어나지 못한다.
해협 봉쇄로 유가가 치솟고 우리나라도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호르무즈 연합’에 군함을 보내라고 을러대다 이제는 그것도 필요 없다며 화를 낸다. 수십 년 지켜 줬으니 보답하라는 말이 호전 적대의 극을 친 북한의 핵 위협에 시달리는 우리의 목덜미를 서늘케 때린다. 관세 협박에 간신히 출구를 찾았다고 안도했지만 이젠 동맹을 들먹이며 멱살이라도 잡을 험상궂은 얼굴에 가슴이 답답하다.
정권의 불법성을 단죄하는 일은 국내적으로 해나갈 수 있다. 학생의거, 시민항쟁, 촛불혁명, 빛의 혁명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우리의 역정은 전쟁이나 외국 간섭 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우리의 게임이 아니다. 피해를 당하고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트릴레마, 딜레마 상황이다.
첫 번째 선택지는 호르무즈 통행을 위해 이란과 협상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실행 가능성이 높지 않다.
둘째는 소해함이든 호위함이든 군함을 보내 호르무즈 연합에 동참하는 방안인데, 이란과의 적대관계에 서게 될 뿐만 아니라 시간과 거리, 군 역량 등 물리적 제약이 크고 장병의 안전도 보장하기 어렵다. 위헌 논란 등 부정적인 국내 여론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나토 국가들이 부정적 의사를 밝힌 마당에 아무리 혈맹이어도 정당성 없는 침공 전쟁에 섣불리 참전할 수도 없다. 일본의 선택을 곁눈질하자는 얘기도 나오지만 어차피 이란과 척지는 일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셋째는 동맹이 침략당한 것은 아니라며 거리를 두는 불개입 방안인데, 현실적으로 미국의 압박과 몽니를 생각하면 이 역시 쉽지 않다.
그래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은 둘째나 셋째겠지만 그 모두가 딜레마이다. 한국이 휴전·종전을 위한 중재에 나서자는 주장도 나오지만 적극 참전을 전제하면 몰라도 웃음거리가 되거나 미움만 살 수 있다. 그나마 호르무즈 봉쇄 규탄에 동참해도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는 주어진 선택구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여서 어느 쪽도 사정이 녹록지 않고 또 위험과 후과가 따른다.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세울 명분은 자국민 보호, 우리 선박의 안전이다. 최대한 한미동맹을 손상하지 않는 차원에서 동행과 지원 의지를 밝히되 물리적 제약이 있다는 점을 납득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여권 지도급 인사라는 이가 방송에 나와 지금으로서는 시간 끄는 게 상책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은 개념 없는 짓이다. 자칫 의도적 지연으로 비치지 않도록 세심한 행보가 중요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