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삼일절 연휴, 강원도 영월은 평소보다 북적였습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열기가 설 연휴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데 따른 건데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영월에 대한 관심도 치솟아 주말 기차표가 빠르게 매진되고 영월 곳곳에서 기나긴 대기 줄이 포착됐습니다. 스크린 속 이야기가 관객을 밖으로 끌어낸 셈입니다.
이번 영월의 분위기는 조금 다릅니다. 단순히 '촬영지라서 가본다'는 차원을 넘어 영화의 감정선을 직접 밟아보고 싶다는 움직임에 가깝기 때문인데요. 영월의 최근 근황은 콘텐츠가 공간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소비하게 하는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고 있죠.

'왕과 사는 남자'는 개봉 한 달여 만에 900만 관객을 돌파, '1000만' 고지도 눈앞에 뒀습니다. 박스오피스 1위를 굳히면서 흥행 독주를 이어가고 있죠.
3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전날 기준 '왕과 사는 남자' 누적 관객 수는 921만3408명으로 나타났습니다. 주말과 삼일절 대체휴일이 이어진 지난달 27일부터 2일까지 나흘간 247만9000여 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900만 명을 훌쩍 넘겼죠.
지난달 27일 27만8061명, 28일 65만5725명에 이어 1일에는 개봉 이후 가장 많은 81만7207명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이 기간 매출액 점유율이 80%를 넘나들었고요. 3일 오전 10시 30분 기준으로도 예매율이 54.6%로 압도적인 만큼 이번 주 1000만 관객 돌파가 유력한 상황입니다.
영화가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단종을 주인공으로 그린 만큼, 흥행 열기는 곧장 해당 지역으로 번졌습니다.
영월군 집계에 따르면 설 연휴 기간 대표 관광지인 청령포 방문객은 1만641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2006명 대비 약 5.3배 증가했는데요. 장릉 역시 7275명이 찾으며 전년 1083명보다 6배 이상 늘었습니다. 영화 속 단종과 엄흥도의 서사가 부각되며 '성지'로 자리 잡은 결과입니다.
교통편도 빠르게 동났습니다. 이번 삼일절 연휴를 앞두고 온라인상에서는 영월행 기차표가 전석 매진된 현황이 화제가 됐는데요. 주요 유적지와 식당 앞에 늘어선 긴 대기 줄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여기에 지난달 28일, 이달 1일 영월 관광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금일 관람객이 많아 청령포 매표가 마감됐다"는 긴급한 공지 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네티즌들은 "청령포 입장 마감 공고라니. 원래는 배가 사람을 기다리는 곳이었는데 참 오래 살고 볼 일", "고무 보트라도 띄우고 싶다" 등 반응을 보였죠.

이는 작품에서 비롯된 감정이 실제 공간 방문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스크린 투어리즘' 양상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드라마 '도깨비'입니다. 극 중 두 주인공이 마주 섰던 강릉 주문진 방파제는 방영 직후 전국적 명소로 떠오른 바 있는데요. 종영 직후인 2017년 상반기 주문진 방문객은 약 166만 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40% 이상 증가했습니다. 현장에선 빨간 목도리와 메밀꽃 소품을 빌려주는 상인들이 등장했고, SKT T맵 검색 데이터 등에서도 주문진 방파제가 증가율 1위를 기록하면서 눈길을 끌었죠.
국경을 넘은 사례도 있습니다. 스위스 이젤트발트(Iseltwald)는 인구 400여 명의 작은 마을인데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속 호숫가 장면으로 유명해진 이후엔 글로벌 K-드라마 성지로 부상했습니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남자 주인공인 북한 장교 리정혁(현빈 분)은 스위스 유학 중 이 마을의 호숫가 부두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데요. 그 연주 소리를 여자 주인공 윤세리(손예진 분)가 여행 중 우연히 듣는 장면이 그려지죠. 피아노가 놓여있던 부두는 이 드라마를 사랑한 관광객들이 필수로 들러 사진을 찍는 장소가 됐습니다. 무려 최근까지도요.
워싱턴포스트(WP)는 5일(현지시간) '사랑의 불시착'이 끝난지 6년이 지났음에도 한국 드라마 열성 팬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지역 관광청에 따르면 2022년부터 인구 400명의 이 마을에 하루 최대 1000명의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지역 관광청의 티티아 바일란트 매니저는 WP에 "이곳은 원래 실제로 사용하던 부두였지만 이용객은 거의 없었다"며 "드라마 덕분에 유명해졌고, 부두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도 생길 정도로 더 유명해졌다"고 말했죠.
영화 '반지의 제왕'이 뉴질랜드 관광산업의 성장을 이끈 건 이미 잘 알려진 사례입니다. 국가 브랜드 가치 제고에도 크게 기여했는데요. 2001년 개봉 이후 2006년까지 뉴질랜드의 관광객은 연평균 7% 이상 증가했고, 방문객의 약 13%가 해당 영화가 여행 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호빗' 세트장은 현재까지도 연간 수십만 명이 찾는 유료 관광지로 운영되는 중이죠.
이들 사례는 모두 작품 속 배경이 단순한 촬영지를 넘어 '가봐야 할 곳'으로 전환됐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관객은 이야기를 소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장면이 남긴 여운을 직접 확인하러 이동합니다.
최명서 영월군수도 영월의 특별함을 강조했는데요. 그는 지난달 25일 YTN 라디오 '슬기로운 라디오생활'와의 인터뷰에서 "청령포는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삼면이 강이고, 뒤쪽 한 면은 아주 험준한 봉우리로 막혀서 천연 요새 같은 곳"이라며 "그래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할 만큼 외부와 단절된 공간인데, 그 고립된 공간이 바로 단종의 유배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그래서 청령포는 단순한 관광지라기보다는 역사의 감정을 체험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죠.

지역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다음 달 24일 개막하는 제59회 단종문화제까지 열기를 잇겠다는 의지인데요. 26일까지 세계유산 장릉과 동강 둔치, 청령포 등지에서 열리는 이번 축제는 '왕의 귀환, 희망의 서막' 주제로 단종을 조명할 예정입니다.
먼저 개막식에서는 뮤지컬 '단종1698'이 무대에 오릅니다. 비운의 왕이 된 단종이 숙종에 의해 복위된 해인 1698년을 상징하는 공연이죠. 특히 이번 축제에서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못다 한 인연을 기리는 '단종·정순왕후 국혼(가례) 재현'이 최초로 진행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왕과 사는 남자'를 연출한 장항준 감독이 방문을 확정했는데요. 영월군이 운영하는 명사 초청 강연 프로그램 '영월아카데미'에 강연자로 나설 예정입니다. 강연뿐 아니라 단종문화제 개막식에도 참여할 계획이죠.
출연진도 힘을 보탭니다. 박지훈은 이번 단종문화제의 축하 영상을 촬영했고요. 유해진, 유지태 등도 축하 영상 제작 및 행사 참석 등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영화의 흥행이 작품 속 배경인 지역 축제로 이어지며 확장 국면으로 접어드는 분위기인데요. 교통, 숙박, 식음료, 기념품까지 소비가 확장되면서 지역 경제 전반에 파급이 이어질 전망입니다. 영화의 티켓 판매가 극장에서 끝나지 않는 구조죠.
특히 역사적 자산을 보유한 지역의 경우 콘텐츠와 결합했을 때 파급력은 더 커집니다. 이미 존재하던 이야기 위에 영화적 해석이 더해지면서 공간은 '설명해야 할 장소'가 아니라 '경험해보고 싶은 장소'로 전환됩니다. 영월 역시 단종의 유배지라는 역사적 상징성이 영화의 감정선과 맞물리며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