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진 | CASA 융합심리연구소 소장 | 한국아동미술치료학회 교수

밤늦은 시각,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이 생겼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까. 예전에는 일기장을 펼치거나 혼자 뒤척이며 생각을 삼켰다면, 요즘은 스마트폰을 켜고 인공지능(AI)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실제로 미국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는 2024년 보고서에서 성인 응답자의 약 27%가 정서적 위로나 개인적 고민을 위해 AI 챗봇과 대화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고민을 친구나 가족이 아닌 AI에게 먼저 털어놓는 장면은 이제 특별하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인간 전문가나 가까운 사람에게는 숨기고 싶은 이야기일수록, 오히려 기계인 AI에게 더 솔직해진다는 사실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비억제 노출 패러다임(Disinhibited Disclosure Paradigm)’ 혹은 ‘디지털 고백(Digital Confessions)’이라고 부른다. 2024년 네덜란드 틸뷔르흐대 연구진은 챗봇에게 개인적 정보를 공개하려는 의도를 분석한 연구에서, 참가자들이 인간 상대보다 AI에게 더 깊고 민감한 정보를 기꺼이 공유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보고했다. 연구진은 이를 신뢰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 위험이 제거된 환경의 효과라고 해석했다. 우리는 왜 사람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AI에게 털어놓게 되는 걸까.
첫 번째 이유는 수치심과 자기 이미지 관리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 연출을 한다. 상담 장면에서도 이 메커니즘은 작동한다.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말 하면 나를 어떻게 볼까”, “유약해 보이지는 않을까”를 계산한다. 그러나 AI는 나의 사회적 평판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존재다. 나라는 사람의 평판에 어떤 영향을 줄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순간, 자기검열은 크게 줄어든다.
두 번째 이유는 관계 손실에 대한 공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고백하면 관계가 변할 수도 있고, 다시 마주쳐야 할 수도 있지만, AI와의 대화에는 그런 위험이 없다. 사회교환이론 관점에서 보면, 위험은 낮고 정서적 보상은 즉각적인 상황이다. 위험 대비 이득이 클수록 사람은 더 쉽게 마음을 연다.
세 번째 이유는 AI가 ‘판단하지 않는 방식으로’ 반응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AI 심리 챗봇 ‘우봇(Woebot)’ 개발에 참여한 임상심리학자 앨리슨 다르시(Alison Darcy)는 “사람들은 조언보다 먼저 판단받지 않는 반응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우봇을 활용한 무작위 대조 실험에서, 2주간 챗봇과 대화한 참가자들은 우울 점수가 통제군보다 유의미하게 감소했으며, 연구진은 그 이유로 ‘비판 없는 언어 톤과 반복적 지지 표현’을 지목했다. 중요한 것은 AI가 진짜로 공감하느냐가 아니라, 판단하지 않는 말투와 일관된 반응이 주는 안정감이다. “너는 괜찮아”라는 문장이 여러 번 반복될 때, 우리는 그 문장의 사실 여부보다 정서적 리듬에 안심하게 된다.
이러한 디지털 고백이 늘어날수록 현실의 인간관계는 두 방향으로 나뉠 수 있다. 한쪽에서는 AI에게만 마음을 털어놓는 데 익숙해지며, 갈등과 판단이 존재하는 실제 관계를 점점 부담스러워하는 사회적 위축이 나타날 수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AI와의 대화를 통해 감정을 먼저 정리한 뒤,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차분하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는 정서적 정리 효과가 나타난다.
결국 차이를 만드는 것은 AI를 대체 관계로 쓰느냐, 준비 공간으로 쓰느냐에 있다. AI는 언제든 말을 걸 수 있고, 새벽 두 시에도 반응하며,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만 집중해 주는 편리한 존재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사회적 간식’에 비유한다. 간식은 허기를 잠시 달래주지만 식사를 대신할 수는 없듯, AI가 주는 위안 역시 인간 사이의 깊은 유대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AI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종착지가 아니라, 그 짐을 가볍게 만들어 다음 단계로 가게 하는 징검다리에 가깝다.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안전하게 풀어내고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사람과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일 때 AI는 가장 건강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AI에게 많은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 고백이 나를 사람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드는지, 아니면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한 준비가 되고 있는지, 그 방향을 점검하는 책임만큼은 여전히 인간에게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