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일적 ‘주 52시간 근무제’의 역설…“기술 패권 흔들린다” [규제 만능주의의 그늘下-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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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는 언제나 명분이 된다.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말로 시작된 규제는 많았다. 그러나 충분한 숙의와 영향 평가 없이 속도를 낸 법안들은 시간이 흐르며 다른 질문을 남겼다. 보호를 목표로 한 규제가 과연 의도한 효과를 냈는지, 아니면 시장의 균형을 흔들고 또 다른 왜곡을 낳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투데이는 ‘선의로 시작된 입법’의 출발과 결과를 추적하고 정치적 상징 뒤에 가려진 비용과 왜곡, 그 책임의 방향을 짚어본다.

(오픈AI 달리)

반도체 연구는 하루 이틀에 결론이 나는 일이 아니다. 실험과 설계, 검증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데, 획일적인 근로시간 틀 안에서는 연구 흐름이 자주 끊긴다.

한 국내 반도체 기업 관계자의 토로다. 반도체 개발은 성공할 때까지 장시간 여러 공정 조건을 바꾸고, 데이터를 쌓는 등 일의 연속성이 중요한데 정해진 근로시간 한도에 맞추다 보면 실험이 중간에 멈추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개발의 특성을 고려해 보다 유연한 근무 환경이 보장돼야 기술 경쟁력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주 52시간 근무제’는 2018년 2월 국회를 통과했다. 그 당시 명분은 분명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장 수준이던 우리나라 근로시간을 줄여 근로자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하겠다는 취지였다. 같은 해 7월 3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적용됐고, 2021년 이후 5인 이상 전 사업장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오늘날 해당 제도는 산업별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일률적으로 적용되면서 여러 현장에서 대표적인 규제로 지적된다. 반도체를 포함한 제조업은 납기와 수주 일정에 따라 특정 시기에 업무가 몰리고, 일정 기간 고강도 연구개발이 불가피한데 획일된 근무 시간으로 효율성이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국가의 기술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간한 ‘3대 게임체인저 분야 기술수준 심층분석’ 브리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고집적·저항기반 메모리 기술 △고성능·저전력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술 △전력반도체 기술 △차세대 고성능 센싱 기술 등 주요 반도체 기초 역량 분야에서 중국이 한국을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 평가에서는 일부 분야에서 한국이 우위를 보였지만, 불과 2년 만에 전반적인 기술 수준이 역전된 셈이다. 중국은 정부의 전폭적인 투자 아래 반도체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동시에,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하는 이른바 ‘996 근무제’를 기반으로 연구개발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게임업계 역시 마찬가지다. 신작 출시를 앞둔 막판 수개월은 근로 시간이 편중될 수밖에 없어 주 52시간 근무제가 규제로 작용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달 발간한 ‘2024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업계 종사자의 34.3%가 신작 출시 직전 야간·주말 근무가 이어지는 이른바 '크런치 모드'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비율 자체는 전년(38.2%)보다 소폭 줄었지만, 크런치 기간 중 주당 최대 근로시간은 56.1시간으로 오히려 전년보다 4.5시간 늘었다. 52시간 상한선이 있어도 정작 집중 근무가 필요한 시기에는 어떤 형태로든 그 벽이 넘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이제는 산업 경쟁력 차원이 아닌, 정치적 정쟁의 소재로 굳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달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반도체 특별법’이다. 업계는 연구개발 인력에 한해 근로시간 규제를 일부 완화하는 예외 적용 조항을 포함해 달라고 요구해왔지만, 여야 간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결국 해당 내용은 법안에서 제외됐다. 기술 패권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도 핵심 산업의 근로시간 유연성 문제는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정치권 공방 속에 멈춰 선 셈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산업 경쟁력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사안이 정치적 이슈에 휘말리면 해법 마련이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며 “제도가 정쟁의 대상이 아니라 산업 현실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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