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RARE ] VOL. 1
가장 우아하고 냉혹한 신분증 ‘향수’:
어느 슈퍼리치의 이야기
"천외천(天外天). 하늘 밖의 하늘이 있다."
부자들 중에서도 '슈퍼리치'라 불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명품관의 오픈런 줄에는 그들이 없습니다. 세상의 0.0001%로 살아가는 그들, '천외천'의 삶은 우리의 상식 밖 궤도에서 움직입니다.
로고가 없는 3000만원짜리 코트, 대중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1억원의 침대, 그리고 지도에서 지워진 리조트. 남들이 알아봐 주길 바라는 '과시'가 아니라, 남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단절'을 사는 그들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요.
이투데이 [THE RARE]는 일반인들은 접하기도 힘든, 그러나 누구나 한 번쯤 훔쳐보고 싶은 견고한 성벽 안쪽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고가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무엇인지, 그들이 지갑을 여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지. 자본주의 최정점에 선 그들의 소비와 취향, 그 속에 숨겨진 부의 트렌드를 들여다 봅니다.
상위 0.0001%가 사는 세상의 문을 열다
VOL. 1 향수

주말 오후, 압구정 로데오나 성수동의 힙한 카페에 앉아있으면 다양한 향수 냄새를 맡게 됩니다. 옆 테이블의 20대 대학생이 일어설 때, 혹은 맞은편 30대 직장인이 코트를 벗을 때 어김없이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칩니다. '르라보 상탈 33'의 묵직한 나무 향, '조말론 블랙베리 앤 베이'의 쌉싸름한 과즙 향, '딥티크 도손'의 고급스러운 비누향까지. 한때 아는 사람만 안다던 비밀스러운 향기들은 이제 서울 도심 어디서나 반복 재생되는 '배경음악'이 되었습니다.
취향이 곧 계급이 되는 '향기 브랜딩'의 시대
이 향수들은 한 병에 무려 30만원에서 40만원을 호가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지갑을 여는 이유는, 이제 향수가 단순히 좋은 냄새를 풍기는 도구를 넘어 자신을 '브랜딩'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샤넬 No.5'처럼 누구나 아는 베스트셀러를 무작정 따라 샀다면, 지금의 대중은 '비 오는 날 런던의 젖은 흙 내음'이나 '오래된 도서관의 종이 냄새'처럼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서사를 소비합니다.
향기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분위기와 취향을 가진 사람인지 정의하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향수 냄새 대신 원래 내 체취인 것처럼 은은하게 퍼지는 '살냄새'가 자주 거론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는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여유를 증명하는 고도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불을 지핀 것은 미디어와 경제적 심리입니다. 최근 유튜브와 SNS를 점령한 '왓츠인마이백'이나 '최애 향수 추천' 콘텐츠는 동경하는 연예인의 취향을 그대로 복제하는 이른바 '손민수' 문화의 핵심입니다. 특히 불황 속에서도 나를 위한 확실한 사치를 즐기는 '스몰 럭셔리(Small Luxury)' 붐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이나 자동차는 당장 가질 수 없지만, 고가의 향수 한 병으로 해당 브랜드가 지닌 아우라와 정체성을 소유하려는 보상 심리가 대중의 지갑을 열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소수를 위한 향수라는 '니치(Niche)'의 본래 의미는 무색해졌습니다. 니치 향수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는 '접근 가능한 명품'이 됐습니다. 실제로 H&I 글로벌 리서치에 따르면 대한민국 향수 시장 규모는 이미 1조원을 돌파했습니다.
백화점 1층을 떠난 슈퍼리치들
대중화된 럭셔리는 진짜 부자들에게 더 이상 럭셔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백화점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브랜드는 사실 거대 자본에 인수되어 대량 생산되는, 하이엔드의 엔트리 모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향기 복제'의 시대에 세상 0.0001%의 슈퍼리치들은 다시금 아무도 모르는 향을 찾아 숨어들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지갑은 백화점 1층의 붐비는 사람들 사이가 아닌,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밀한 밀실과 세계 몇 군데 밖에 없는 폐쇄적인 부티크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뿌릴까요?
그들이 왜 보이지 않는 향기 한 방울에 집 한 채 값을 아낌없이 쓰는지,
그 오만하고도 은밀한 욕망의 향기를 쫓아가 봅시다.
BRAND 01 . AMAFFI
오만한 게 나쁜 건가요?

런던의 슬론 스트리트나 뉴욕의 빌리어네어스 로(Billionaires’ Row)에 위치한 아마피 부티크 앞을 지나간다면, 당신은 이곳을 왕실의 금고나 박물관으로 착각할지도 모릅니다.
"접근 가능한 명품은 거대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Accessible luxury is just a big nonsense)
아마피가 내세우는 공식 매니페스토의 한 구절입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멸종된 품격을 부활시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자 교양의 수호자로 칭합니다. 아마피는 단호하게 자신들이 모두를 위한 브랜드가 아니며, 선택받은 세상의 권력자들과 아름다운 이들을 위한 것이라 선언합니다. 매니페스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소유하라, 그리고 지배하라(Possess and rule)"는 문장은 이들이 향수라는 상품을 빌려 계급과 권력을 팔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아마피는 자신들의 기원을 나폴레옹 시대의 전설적인 조향사에게서 찾습니다. 하지만 이 브랜드의 진짜 매력은 역사보단 철저한 신비주의와 배제에 있습니다. 그들은 샤넬이나 디올처럼 마케팅을 위해 수백만 개의 샘플을 뿌리지 않습니다. 매장에서 시향을 원할 때도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며, 시향지인 종이를 매장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살 능력이 있는 사람만 맡으라는 이 오만함이야말로 슈퍼리치들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최고의 마케팅입니다.
이들의 향수병에는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습니다. 가격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구매할 능력이 없음을 시인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마피에서 가장 저렴한 엔트리 라인의 가격은 50ml 한 병에 3000달러, 한화로 약 420만원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백화점 명품 향수 10병을 살 수 있는 돈이 이곳에서는 고작 입문용 가격에 불과합니다. 주력 제품인 ‘글로리’나 ‘파워’라인으로 넘어가면 가격은 1000만원을 가볍게 호가합니다.
이 비현실적인 가격을 피부에 와닿게 환산해봅시다. 보통 향수 펌프를 한 번 누를 때 분사되는 양은 약 0.1ml 내외입니다. 1000만원짜리 향수 50ml를 기준으로 계산했을 때, 당신이 외출을 위해 가볍게 뿌리는 한 번의 펌핑 비용은 약 2만원입니다. 양쪽 귀 뒤와 손목에 가볍게 세 번만 뿌려도 순식간에 6만원이 공중으로 사라지는 셈입니다.
사실 이 향수병은 화장대 위에 놓는 소품이기도 합니다. 금속과 크리스털, 천연석으로 장식된 병은 마치 제정 러시아 시대의 보물이나 왕의 홀을 연상시키며, 한 손으로 들기 버거울 정도로 묵직한 무게감을 자랑합니다.
아마피는 누가 쓴다고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생명처럼 여깁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중동의 석유 재벌 가문의 여성들, 러시아의 신흥 재벌인 올리가르히, 그리고 신원이 노출되기를 꺼리는 유럽의 은둔형 귀족들이 주 고객층입니다. 그들에게 아마피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자신의 부와 지위를 증명하는 강력하고도 오만한 신분증입니다.
BRAND 02 . ROJA PARFUMS
천재 조향사가 자신을 위해 만든 최고의 향수

영국 하이엔드 향수의 정점인 로자 파퓸 역시 화려함에 집중합니다. 이 브랜드는 향기라는 보이지 않는 사치를 시각적으로 가장 화려하고 직관적인 자본의 형태로 과시합니다. 프랑스 겔랑에서 20년간 수석 조향사로 일했던 천재적인 조향사 로자 도브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든 이 하우스는 '오직 최고만을 허락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오늘날 향수계의 스타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기성 향수 중 하나로 꼽히는 '오트 럭스(Haute Luxe)'의 탄생 일화
로자 도브는 비용의 타협 없이 세상에서 가장 구하기 힘든 최상급 원료만을 배합해 오직 자신만이 쓸 단 하나의 향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장장 10년 동안 이 향수를 절대 판매하지 않고 오로지 본인만 사용했습니다.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이 압도적인 향기에 매료된 전 세계의 재벌과 왕족들이 백지수표를 내밀며 제발 팔아달라고 애원한 끝에, 마지못해 1년에 딱 250병만 한정 생산하기로 타협하며 내놓은 것이 바로 오트 럭스입니다.
이 전설적인 향수의 가격은 100ml 한 병에 3500달러, 한화로 약 500만원에 육박합니다. 무엇보다 로자는 이 값비싼 액체가 단순한 후각적 소모품으로 취급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트 럭스의 투명한 유리병 안에는 진짜 24K 순금 가루가 눈처럼 둥둥 떠다닙니다. 향수를 뿌리는 순간, 미세한 금박이 피부 위에 고스란히 내려앉아 반짝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향기를 넘어 시각적인 과시의 극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골적인 화려함은 스스로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전 세계의 권력자들을 단숨에 매료시켰습니다. 실제로 중동의 왕족과 석유 재벌들이 로자 도브를 개인 전용기에 태워 자국으로 모셔간 뒤 자신만의 맞춤 향수를 의뢰한다는 일화는 업계에서 유명합니다. 아랍의 유명 가수 아흘람 알 샴시를 비롯해 막대한 부를 가진 중동 셀럽들이 이 브랜드와 직접 협업하기도 했습니다.
BRAND 03 . HENRY JACQUES
기다림이라는 사치

아마피와 로자파퓸이 화려함으로 사람들을 압도한다면, 앙리 자크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들의 상징은 고작 성인 엄지손가락만 한 15ml의 아주 작은 크리스털 병입니다. 이 은밀한 하우스의 시작은 창립자 앙리 크레모나와 그의 아내 이베트, 그리고 천재적인 조향사 조셉 사시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삶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보존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설립된 이 브랜드는, 패션계의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에 필적하는 오트 파르퓨메리(Haute Parfumerie), 즉 최고급 맞춤 향수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향수 시장에서 앙리 자크가 철저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프랑스 프로방스에 자신들만의 연구소와 공방을 갖추고 있으며, 심지어 귀한 메이 로즈(Rose de Mai)를 직접 재배하는 전용 농장까지 소유하고 있습니다. 대량 생산을 위한 불필요한 희석이나 합성 향료의 사용은 철저히 배제됩니다. 대신 사람의 체온과 섬세한 손길을 거쳐 향이 스스로 생명력을 얻고 조화로워지기를 묵묵히 기다립니다. 공방의 장인들이 향수병에 금빛 리본을 두르고 밀랍으로 인장을 찍어 밀봉하는 모든 과정 역시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끝에서 완성됩니다.
이러한 고집은 그들의 시그니처인 사용 방식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앙리 자크는 우리가 흔히 아는 스프레이 분사 방식을 거부합니다. 귀한 향수를 공기 중에 허공으로 낭비하는 것은 이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신 병뚜껑에 달린 섬세한 크리스털 막대를 이용해 손목이나 귀 뒤에 단 한 방울만 콕 찍어 바르는 순수한 에센스를 고집합니다. 알코올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가벼움 대신, 원액이 피부의 온도와 섞이면서 하루 종일 무겁고 깊게 머무는 진정한 의미의 살냄새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작고 우아한 한 방울의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15ml 용량의 클래식 라인 한 병 가격은 한화로 약 150만원을 가볍게 넘깁니다. 시중에서 파는 작은 안약 통 크기의 액체가 웬만한 직장인의 한 달 월급 절반과 맞먹는 셈입니다.
오랫동안 소수의 상류층 아파트나 저택의 밀실에서만 비밀스럽게 거래되던 이 브랜드는 창립자의 딸 안 리즈 크레모나와 예술 감독 크리스토프 톨메르에 의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2014년 런던 해로즈 백화점을 시작으로 뉴욕, 파리를 거쳐 곧 서울에도 부티크를 열며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그들이 고수하는 콧대 높은 철학은 여전합니다. 진정한 상위 0.1%의 슈퍼리치들은 진열장에 놓인 기성품에 만족하지 않고 르 쉬르 므쥐르(Le Sur-Mesure)라 불리는 ‘완전한 맞춤 제작’을 의뢰합니다.
테니스 황제 라파엘 나달 부부, 그리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할리우드 배우 양자경 등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 자리에 오른 이들이 바로 이 향수의 열렬한 고객입니다. 수개월을 논의하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향을 완성하고, 이를 수공예 크리스털 병에 담아내는 데 드는 비용은 최소 5000만원에서 1억원을 훌쩍 넘깁니다.
"시간을 세지 말 것, 원료의 완벽함에 타협하지 말 것."
창립자 부부가 남긴 이 엄격한 원칙 아래, 앙리 자크는 속도의 시대에 역행하는 사치를 선보입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소비되는 현대 사회에서 오직 나만의 향수를 위해 긴 시간을 기꺼이 할애하는 것. 앙리 자크는 막대한 부를 넘어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시간적 자본까지 소유한 이들에게, ‘기다림’이라는 가장 우아한 방식의 사치를 증명해 내고 있습니다.
BRAND 04 . GUERLAIN BESPOKE
가문의 역사를 기록하는 향수

앞서 만난 세 브랜드가 현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과시 또는 은밀함의 정점이라면, 마지막으로 소개할 겔랑은 돈만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시간과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1828년에 시작된 겔랑은 향수라는 물건이 어떻게 한 사람의 권력이 되고 가문의 유산이 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브랜드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1853년 프랑스 황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의 아내인 유제니 황후는 지독한 편두통에 시달렸는데, 창립자 피에르 프랑수아 파스칼 겔랑이 황후를 위해 시원한 시트러스 향을 섞은 향수를 만들어 바쳤습니다. 기적적으로 두통이 사라지자 감격한 황후는 그에게 황실 공식 조향사라는 직함을 내렸습니다. 이때 황실을 상징하는 꿀벌 문양을 병에 새기게 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겔랑을 대표하는 최고급 향수병인 비 보틀의 시작입니다.
현대에도 안젤리나 졸리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겔랑의 모델로 활동하며 어머니가 쓰던 겔랑 파우더 향을 추억하듯, 겔랑은 유럽 왕실과 유명 인사들의 세대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상위 0.1%의 부자들은 백화점 매장에 진열된 겔랑 향수를 사지 않습니다. 그들은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겔랑 본사 밀실로 향해, 오직 나만을 위한 향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만드는 비스포크 맞춤 제작 서비스를 의뢰합니다. 겔랑의 수석 조향사와 수개월에 걸쳐 상담을 진행하고, 내 성격과 어린 시절의 기억, 좋아하는 풍경까지 모두 향기로 만들어 내는 길고 복잡한 작업입니다.
이 황실 서비스의 청구서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나만의 향수를 만드는 시작 가격은 최소 1억원을 가볍게 넘어섭니다. 향수 펌프를 한 번 누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고급 외제차 한 대 값인 셈입니다.
하지만 겔랑 비스포크의 진정한 가치는 이렇게 만들어진 향수 레시피가 겔랑의 비밀 금고에 영원히 보관된다는 점입니다. 고객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자녀나 손주가 언제든 겔랑에 연락해 할아버지의 향기, 어머니의 향기를 똑같이 다시 주문할 수 있습니다.
"향수는 기억의 가장 강렬한 형태이다."
- 장 폴 겔랑(Jean-Paul Guerlain)
슈퍼리치들이 1억원이라는 거금을 겔랑에 지불하는 이유는 단순히 향이 좋아서는 아닐 겁니다. 그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후손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수 있는 불멸의 유산을 '향기'라는 형태로 물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돈으로 시간을 넘어선 ‘영원’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겔랑 비스포크가 보여주는 럭셔리의 끝입니다.
EPILOGUE
향기, 사람을 입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향수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계급의 성벽'을 쌓는 가장 우아하고도 냉혹한 도구였습니다.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잘 스며듭니다. 보석이나 옷처럼 값을 한눈에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인상과 거리감을 순간적으로 결정합니다. 계급은 늘 말로 설득하기보다, 공기처럼 먼저 도착해 몸에 닿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향료는 오직 신과 파라오만이 소유할 수 있는 '신의 땀방울'로 여겨졌으며, 이를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신성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후 17세기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향수를 단순한 기호품을 넘어 통치 체제의 핵심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는 매일 다른 향수를 뿌릴 것을 명령하고, 베르사유 궁전의 분수대마저 향수로 채우며 자신의 절대 권력을 후각적으로 각인시켰습니다. 당시 귀족들에게 향기란 '내가 왕의 곁에 머물 자격이 있는 자'임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신분증이었던 셈입니다.
오늘날의 향수 열풍 역시 이 '계급적 갈망'의 현대적 변주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수십만 원의 향수에 열광하는 건 단순히 "향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불확실한 시대에 향기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나의 이미지를 상향 평준화해주는 매혹적인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옷은 브랜드 로고를 노출해야 하고 말은 품격을 증명하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향기는 마주치는 찰나에 상대의 본능을 파고들어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권위를 부여합니다.
슈퍼리치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하며 나만의 향에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치품은 가격표가 예상되지만, 처음 맡아보는 낯선 향기는 그 사람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 보이지 않는 신비감이 곧 권력이자,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는 나라는 존재를 완성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는 세상의 모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천재적인 후각을 가졌지만, 정작 자신만의 체취는 한 점도 없는 기이한 인물입니다. 체취가 없다는 것은 곧 '존재감의 부재'를 의미했고, 세상은 그를 투명 인간이나 괴물처럼 취급했습니다.
그 지독한 결핍을 채우기 위해 그르누이는 아름다운 소녀들의 향기를 훔쳐 군중을 지배할 '궁극의 향수'를 만들어냅니다. 그의 향수는 사람들을 맹목적인 복종과 숭배로 이끌며 그를 신적인 권력자의 위치에 올려놓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완벽한 향기 속에도 '그르누이 자신'은 없었습니다. 타인의 향기를 훔쳐 만든 그 화려한 가면으로는 진정한 사랑도, 자신의 텅 빈 고독도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결국 스스로 파멸을 선택하고 맙니다.
이 서늘한 우화는 우리가 명품 향수의 세계를 탐닉하면서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르누이가 그토록 갈망했던 것은 군중을 굴복시킬 완벽한 향 이전에, 타인과 온기를 나누고 교감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투박한 '살냄새'였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도 완벽하게 조향 된 향수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덜미에서 나는 친숙한 살냄새를 더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향수는 결국 우리 몸의 진짜 냄새를 덮는 ‘가면’입니다. 아무리 비싸고 희소한 향기로 온몸을 감싼다 해도, 그것이 나의 본질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입는 옷, 내가 뿌리는 향수가 나라는 사람을 대변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향기를 입는다고 해서 향기로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남들보다 더 높은 계급의 향수를 찾기 위해 밀실을 헤매기보다는, 지금 나에게선 실제로 어떤 향기가 나는지 돌아보는 건 어떨까요. 아무리 비싼 향수도 차가운 시향지 위에서와 따뜻한 내 살결 위에서의 향이 다르듯, 결국 향기의 완성을 결정하는 것은 브랜드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사람의 고유한 온기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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