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도시는 무엇으로 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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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성균관대학교 인공지능융합원 교수

▲김형태 성균관대학교 인공지능융합원 교수 (성균관대학교)
요즘 세상은 변화의 ‘속도’가 아니라, 변화의 ‘기준’을 다시 묻고 있다. 기술은 나날이 빠르고 정교해지며, 도시의 인프라는 한층 세련된 얼굴을 띤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체감하는 변화의 본질은 그저 속도전에 있지 않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향하며 나아가야 하는가. 이 근본적인 물음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연스레 고개를 들고 있다.

출근길, 도심의 스마트쉘터 안은 안락하고 고요하다. 실시간 교통정보와 공기질 수치가 스크린에 흐르고, 냉난방 장치는 한 치의 오차 없이 돌아간다. AI가 교통 흐름을 예측하고 데이터가 행정의 빈틈을 메우는 오늘날, 도시는 분명 이전보다 쾌적해졌다. 하지만 이토록 빠르고 효율적인 시스템 속에 서 있을 때면 문득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묻게 된다. 완벽하게 설계된 이 도시에서, 지금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떤 형태로 축적되고 있을까.

오랫동안 도시는 ‘높이’를 경쟁해왔다. 더 높은 빌딩을 세우고, 더 거대하게 개발하며, 더 빠르게 확장하는 것이 곧 발전이자 경쟁력이었다. 하지만 건물의 물리적 높이는 언젠가 또 다른 높이에 의해 쉽게 대체되고 만다. 겉모습은 끊임없이 갱신되지만, 정작 그 안의 기억은 휘발되기 십상이다. 도시의 진짜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축적된 경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지낸다.

틈이 날 때면 종종 지하철에 몸을 싣고 도시 곳곳을 누비며,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눈과 사진으로 묵묵히 담아내곤 한다. 내가 사는 성수동 일대를 그렇게 찬찬히 들여다보며 마주한 변화가 유독 깊은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곳은 산업화 시대의 투박한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대신, 과거의 일부를 남겨두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물리적 공간에 ‘시간’이 단단히 닻을 내리게 되었다. 과거의 벽돌 틈으로 현재의 일상이 겹쳐 읽히는 이 장소는, 이제 단순한 상업 공간을 넘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이곳을 그저 소비하고 떠나는 대신 머물며 경험하고, 그 경험은 다시 기억되어 지역의 고유한 자산으로 쌓인다. 새로움이 아니라, 오래된 '축적'이 공간의 진짜 힘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사례도 궤를 같이한다. 자동차 중심의 도로망을 걷어내고 사람 중심의 공간을 넓힌 것은, 단순한 교통 정책의 변화를 넘어 도시가 무엇을 최우선 가치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결단이었다. 시민들이 거리에 머물며 서로 관계를 맺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도시는 내면에서부터 단단해졌다. 물론 오늘날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는 도시를 한층 정교하게 움직인다. 현실세계의 이동과 소비, 민원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정책을 재빠르게 다듬어낸다. 그러나 수많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은 현상을 차갑게 짚어낼 뿐, 그 안에 담긴 삶의 따뜻한 온도까지 오롯이 담아내지는 못한다. 효율성이 높아졌다고 해서 시민들의 신뢰까지 자동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첨단 기술이라도 진정한 의미가 있으려면, 결국 시민의 구체적인 일상 및 경험과 맞닿아야만 한다. 차가운 수치 위에 사람의 온기와 기억이 포개질 때, 비로소 정책은 생명력을 얻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결국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도시는 과연 무엇으로 남아야 할까. 나아가,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도시를 물려주어야 할까? 이제 우리는 화려한 스카이라인을 뽐내는 도시에 머물러선 안 된다. 그곳만의 고유한 콘텐츠를 빚어내고, 이를 다함께 기록하며 공감하는 도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후미진 골목의 소박한 변화, 청년들의 치열한 도전과 뼈아픈 실패, 지역 공동체가 품어온 소소한 기억들이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고 겹겹이 쌓여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부터라도 수도 서울의 생생한 우리 이야기를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는 ‘시민기록관’을 위촉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제안이다. 시민의 눈으로 일상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고, 차가운 데이터가 담아내지 못하는 삶의 온도를 공공의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오래된 낡은 공간을 무작정 부수고 새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시민기록관의 손길을 통해 그 공간에 스며든 시간을 섬세하게 읽어내고 이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도시 발전이자, 내일을 설계하는 가장 튼튼한 기초다.

역동적인 도시는 결코 맹목적인 속도전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시민들의 생각과 이야기로 구석구석 채워질 때 비로소 숨을 쉰다. 도시는 차가운 건물로 기억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촘촘히 남긴 삶의 흔적으로 호흡하고 이어진다.

이제 우리는 속도를 겨루는 대신,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숙고해야 한다. 가시적인 높이를 포기하고 보이지 않는 깊이를 선택할 때, 도시는 비로소 우리 곁에 생명력 있게, 그리고 오래도록 남게 될 것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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