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빌딩 숲 속의 섬… 사람 냄새 가득한 그곳 [영동시장 사람들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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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속도와 효율만이 미덕인 차가운 도시 강남. 그 화려한 마천루의 그림자 아래, 여전히 뚝배기 끓는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멈추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영동전통시장입니다. 50년 전, 주택가 담벼락에 기대어 서로의 고단한 끼니를 챙기던 '강남의 부엌'은 , 이제 퇴근길 직장인과 호기심 어린 청년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건배를 나누는 '소통의 광장'이 되었습니다. 비록 세상은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것이 배달되는 시대로 변했지만, 이곳에는 여전히 모니터 너머로는 느낄 수 없는 투박한 정과 따뜻한 눈맞춤이 살아 숨 쉽니다. 본 기획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시장이 아니라, 상인이 스승이 되고 손님이 친구가 되는 '관계의 기적'을 조명합니다. 삭막한 도심 속, 우리가 끝내 지켜야 할 것은 낡은 좌판이 아니라 그 위에 켜켜이 쌓인 '사람의 온기'임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강남구 논현동 영동전통시장. (박상군 인턴 기자 kopsg@)
서울 강남구 논현동. 강남대로의 마천루들이 뿜어내는 현대적인 속도전 바로 뒤편에는, 거짓말처럼 다른 시간이 흐르는 공간이 있다. 화려한 프랜차이즈 간판과 유리 빌딩의 숲에 둘러싸인 채 반세기 가까이 자리를 지켜온 ‘강남의 섬’, 영동전통시장이다. 개발의 광풍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남은 이곳은, 강남이라는 도시가 잃어버린 ‘생활의 감각’을 유일하게 붙들고 있는 공간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시장은 묘한 부조화의 활기로 가득 찬다. 사원증을 목에 건 직장인들이 순대국밥집 앞에 줄을 서고, 그 옆에서는 장바구니를 든 지역 주민들이 떡을 고른다. 저녁이 되면 풍경은 또 달라진다. 퇴근길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와인잔을 기울이거나, 노포에서 고기를 굽는다. 20대부터 80대까지, 내국인과 외국인이 뒤섞이는 이 혼종의 생태계는 영동전통시장만이 가진 독특한 생존 방식이다.

‘강남’과 ‘전통시장’, 그 이질적인 공존의 역설

▲강남대로변에 영동전통시장 안내기둥이 설치돼 있다. (박상군 인턴 기자 kopsg@)
영동전통시장의 존재는 그 자체로 ‘역설’이다. 전국적으로 전통시장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의 공세 속에서 전통시장은 낡고 불편한 공간으로 인식되며 도태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다. 그러나 영동전통시장은 강남 한복판,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임대료가 비싼 땅 위에서 살아남았다.

▲유미희 영동전통시장 상인회 매니저가 27일 서울 강남구 영동곰탕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현호 기자 hyunho@ (이투데이DB)
이 생존의 배경에는 ‘압도적인 접근성’이 있다. 유미희 영동전통시장 매니저는 “근거리에 3호선, 7호선, 9호선, 신분당선 등 지하철 4개 노선이 지나가고, 버스 노선도 많아 교통은 사통팔달”이라며 입지의 힘을 강조했다. 접근성은 곧 시장의 생명력이다. 인근 직장인들은 점심을 해결하러 들르고, 퇴근길에는 술 한 잔을 위해 발길을 옮긴다.

▲서영경 논현축산물판매장 대표가 15일 서울 강남구 논현축산물판매장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현호 기자 hyunho@ (이투데이DB)
단순히 위치만 좋은 것이 아니다. 영동전통시장은 스스로의 기능을 재조립했다. 서영경 논현축산물 대표는 “강남에도 대형마트는 많지만, 우리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기준’을 판다”고 말했다. 대치동이나 서초동의 주민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가격 때문이 아니라, 백화점 못지않은 품질과 그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쇠퇴와 생존 사이, 위기의 징후들

(출처=강남구청 '영동시장' 사진아카이브)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활기 뒤에는 그림자도 짙다. 통계는 냉정하다. 소비 패턴은 온라인으로 급격히 이동했고, 젊은 층에게 전통시장은 여전히 낯선 공간이다. 상인들은 “예전만큼 손님이 많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최병태 중외약국 약사가 15일 서울 강남구 중외약국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현호 기자 hyunho@ (이투데이DB)
최병태 중외약국 약사는 “과거에는 노점에 사람들이 부딪칠 정도로 많았지만, 지금은 대형마트와 온라인에 밀려 상권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낮 시간대는 직장인들로 북적이지만, 장보기 기능이 약화되면서 정육점이나 채소가게 같은 식재료 점포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신 식당과 술집이 늘어나며, 시장의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남겨야 할 미래’로서의 시장

▲서울 강남구 논현동 영동전통시장에서 사람들이 꽈배기와 반찬 등을 구입하기 위해 가게 앞에 줄을 서 있다. (박상군 인턴 기자 kopsg@)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동전통시장이 ‘남아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도시는 효율성만으로 구성될 수 없다. 박승배 서울과학기술대 시각디자인전공 교수는 “전통시장은 도시의 스토리를 담고 있는 공간”이라며 “모든 시장을 살릴 수는 없기에, 지역의 특색과 스토리를 가진 시장은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낡은 공장을 카페로 바꿔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 성수동처럼, 영동전통시장 역시 강남이라는 도시에 ‘시간의 층’을 입히는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다.

또한, 오프라인 공간의 핵심 가치인 ‘다양성’ 측면에서도 시장의 존재는 중요하다. 조춘한 경기과학기술대 패션디자인과 교수(유통연구소장)는 “영동전통시장은 높은 접근성과 먹거리 등 다양한 기능이 결합된 ‘가는 길에 들르는 시장’이라는 포지션을 확보한 사례”라며 “오프라인의 경쟁력은 특정 업종의 우위가 아니라 소비자의 선택지를 넓히는 버라이어티에 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이곳은 과거의 유산에 머무르지 않는다. 젊은 세대의 창업과 디지털 전환이 동시에 실험되는 ‘미래형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유 매니저는 “강남의 배달 경쟁력을 보고 젊은 상인들이 시장으로 들어오고 있다”며 “오프라인 경험과 온라인의 편리함이 결합된 새로운 도심형 시장 모델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영동전통시장을 남긴다는 것은, 삭막한 도심에 ‘사람이 모이고 머무는’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지켜내는 일과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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