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카드는 거칠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산업계가 더 불편해하는 지점은 따로 있다. 미국의 통상 프레임은 이미 한 단계 진화했는데 한국의 산업정책은 여전히 이전 국면의 언어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세라는 현실이 눈앞에 와 있는데도 정책 판단은 아직 선거와 여론의 계산에 머물러 있다.
미국은 더 이상 반도체 산업을 ‘보조금 경쟁’으로 관리하지 않는다. 세액공제와 직접 지원 대신 관세라는 보다 직접적인 수단으로 기업의 선택지를 좁히고 있다. 미국 안에서 생산하면 보호하고 밖에서 생산하면 비용을 물리는 방식이다. 인공지능(AI) 반도체를 둘러싼 최근 조치들은 보조금보다 관세가 더 강력한 정책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통상 정책의 외피를 썼지만 실제로는 산업 통제에 가깝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대미 투자 해석도 이미 달라졌다. 삼성전자의 미국 텍사스 파운드리 공장과 SK하이닉스의 인디애나 패키징 투자는 표면적으로는 현지 수요 대응과 기술 경쟁력 강화를 내세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를 관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비용, 다시 말해 ‘무관세를 확보하기 위한 입장료’로 보는 시각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미국 내 생산과 후공정 거점 확보는 선택지가 아니라 관세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한 방어 수단이 됐다.
이 변화는 기업 내부에서 이미 상수로 작동하고 있다. 투자 심의 과정에서 환율이나 인건비보다 먼저 검토되는 항목이 관세 시나리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관세가 부과될 경우 원가 구조가 어떻게 바뀌는지 어느 공정까지 미국 안으로 가져가야 하는지가 선행 검토 대상이 된다. 반도체뿐 아니라 자동차, 배터리, 가전 등 미국 비중이 큰 산업 전반에서 비슷한 논리가 작동한다.
문제는 정책의 속도다. 기업은 다음 국면을 계산하며 움직이는데 정책은 여전히 이전 프레임에 머물러 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확정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사업을 다시 지역 이전 논쟁으로 끌어들이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글로벌 반도체 경쟁이 속도전으로 전환된 상황에서 이미 결정된 투자를 정치적 쟁점으로 재가공하는 모습은 산업정책의 자해에 가깝다.
산업정책에는 기본 질서가 있다. 확정된 투자는 그대로 추진하고 지역 균형은 미래 투자로 풀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질서가 무너지면 정책은 곧바로 불확실성이 된다. 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리스크는 관세 자체가 아니라 정책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신호다. 한 번 흔들린 신뢰는 회복하기 어렵고 투자 의사결정은 즉시 보수적으로 바뀐다.
과거에도 대규모 설비 투자 계획이 정치 일정이나 지역 갈등에 막혀 지연되면서 결국 해외로 방향을 튼 사례들은 반복돼 왔다. 관세의 시대에는 이런 지연 비용이 더 치명적이다. 글로벌 공급망이 빠르게 재편되는 상황에서 몇 개월의 차이는 곧 경쟁력의 차이로 직결된다.
미국의 통상 전략이 옳은지 그른지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이 그 변화를 얼마나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있느냐다. 관세는 일시적 변수가 아니라 구조적 조건이 됐다. 이 조건을 인정하지 않은 채 과거의 정책 언어를 반복하면 산업정책은 현실과 점점 멀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구호가 아니다. 이미 바뀐 게임의 규칙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업은 관세를 계산하며 투자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이제 정책도 표가 아니라 시간을 계산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