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너머] 서학개미 탓하기 전에…韓 증시가 잃어버린 것들

요즘 ‘서학개미’는 웬만한 경제 이슈의 모든 원인처럼 소환된다.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개인이 달러를 사들여서” 그렇고, 국내증시가 힘을 못 쓰면 “돈이 해외로 빠져나가서” 그렇다는 식이다. 편리한 논리다. 원인을 개인의 선택으로 돌리면 책임 소재는 명확해지고, 별다른 구조적 처방 없이도 “과열을 진정시키겠다”는 메시지를 내기 쉬워진다. 문제는 그 순간부터다. 구조의 문제를 개인 탓으로 축소하는 순간, 논쟁은 쉬워지지만, 해법은 멀어진다.

해외투자 확대가 환율과 자금 흐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 자체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다만 “돈이 나간다”는 현상만 볼 뿐, “왜 나갔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자주 생략된다. 많은 개인 투자자에게 해외 투자는 더 이상 모험이 아니라 합리적 대안이다. 혁신 성장 산업과 기업은 해외 시장에 더 많이 포진해 있고, 증시 역시 장기적으로 오르며 수익성을 증명해 왔다.

반면 국내 시장은 투자자에게 뚜렷한 확신을 주지 못했다. 주주환원 확대는 여전히 더디고, 지배구조 이슈는 걸핏하면 불거진다. 기업가치 제고를 말하지만 정작 투자자가 체감하는 변화는 “공시가 늘었다”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장 탈출’이 애국심 문제가 아니라 상품성과 신뢰 문제로 읽히는 건 그래서다. 자본은 국적이 아니라 예측 가능성을 따라 움직인다. 실적이 좋으면 주가가 오르고, 성과가 나면 주주와 공유된다는 상식적인 믿음이 작동해야 한다. 이 기본값이 흔들리니 개인 자금이 해외로 향하는 건 원인이 아니라, 우리 시장이 보여준 불확실성에 대한 결과에 가깝다.

그런데도 정책과 감독의 시선은 종종 개인으로 먼저 향한다. 개인을 직접 규제하기 어려우니 증권사에 가이드를 내리는 식으로 우회적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필요한 조치일 수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국내 증시가 풀어야 할 숙제, 즉 투자자가 떠나지 않게 만들 근본적인 체질 개선은 또다시 뒷전으로 밀린다는 점이다.

지금 필요한 질문은 “어떻게 서학개미를 막을까”가 아니다. “왜 국내 시장이 투자자의 기본값이 되지 못했나”여야 한다. 해외 투자 과열을 경계하기 전에, 우리 자본시장이 투자자에게 준 것과 주지 못한 것을 냉정히 복기해야 한다.

신뢰, 예측 가능성, 공정한 룰, 성과의 공유. 네 가지 기본기가 채워지지 않은 시장에서 개인에게만 ‘돌아오라’고 말하는 건 공허하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뉴스
댓글
0 / 300
e스튜디오
많이 본 뉴스
뉴스발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