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금산분리’가 아니라 ‘첨단산업 규제’ 문제다

며칠 전 SK그룹 관계자와의 저녁 자리에서 화제는 자연스럽게 글로벌 반도체 경쟁과 인공지능(AI) 투자 환경으로 흘러갔다. 주요국들이 속도전을 벌이는 첨단산업 판도 속에서 국내 기업들이 체감하는 규제 부담을 이야기하던 중, 대화는 어느새 금산분리 이슈로 이어졌다.

그러자 그는 잠시 말을 고른 뒤 “‘금산분리 완화’라는 표현은 가능하면 피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제를 풀어달라는 요구 자체는 맞지만, 논의의 본질은 금융업에 뛰어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첨단산업 경쟁에서 발목을 잡는 규제를 정비해 달라는 데 있다는 설명이었다. 특정 그룹의 지배구조 특혜로 비치는 순간, 정책 논의 자체가 정치적 프레임에 갇혀버린다는 부담감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요즘 반도체와 AI 경쟁을 들여다보면, 승부는 ‘누가 더 똑똑하냐’뿐만 아니라 ‘누가 더 빨리 깔고, 더 빨리 돌리느냐’에서 갈린다. 반도체 경쟁은 시간표 싸움이다. 공장 하나를 짓는 데만 해도 부지 선정과 인허가, 기반 시설 조성까지 수년이 소요된다. 반도체 장비 역시 주문부터 반입·설치, 공정 안정화까지 또다시 2~3년이 걸린다. 이런 산업에서 자금 조달 경로를 규제로 한쪽에만 묶어두면, 결국 속도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최근 정부가 첨단산업에 한해 지주회사 체계의 증손회사 지분 요건을 100%에서 50%로 낮추기로 한 흐름도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이를 ‘금산분리 완화’라는 프레임으로만 보면 논쟁은 쉽게 정치화된다. 그러나 본질은 다르다. 기술전쟁 국면에서 우리만 스스로 속도 제한을 걸어둘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

이번 논의가 논란을 부르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 요건을 충족하는 대상이 사실상 SK그룹, 그중에서도 SK하이닉스로 수렴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정책의 목적이 ‘특정 기업 살리기’가 아니라 ‘초대형 첨단투자가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라면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누가 혜택을 받느냐”보다 “이 구조가 다른 첨단산업에도 재현 가능한가”가 핵심이다.

정부가 동시에 띄운 150조 원 규모 국민성장펀드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정부보증채권 75조 원과 민간자금 75조 원을 결합한 이 구상은, 단순히 ‘돈을 더 얹어주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 특수목적법인(SPC), 장기 임대 구조 등 민간 자금이 실제로 들어올 수 있는 판을 만들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첨단산업 투자를 가로막는 금융·지배구조 규제를 풀겠다는 신호다.

세계는 이미 보조금과 펀드, 세제로 기술전쟁을 치르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법(CHIPS Act)으로 527억 달러를 투입했고, 유럽연합(EU)도 EU 반도체법으로 430억 유로 규모의 동원 계획을 내놨다. 중국은 ‘빅펀드3’를 통해 국가 자금을 다시 키우고 있고, 일본 역시 정부 주도로 첨단 제조 기반 복원에 나서고 있다. 이런 판에서 한국 정부가 할 ‘최소한’은 무엇일까. 거창한 구호보다 투자 속도를 막는 규제 병목 제거, 정책자금과 민간자금이 섞일 수 있는 구조 설계, 그리고 남용을 막는 안전장치다.

이번 규제 완화를 ‘금산분리냐 아니냐’로만 붙잡으면 프레임 싸움만 남는다. 첨단산업 규제 완화는 특혜가 아니라, 국가가 기술전쟁의 전장에서 갖춰야 할 기본 장비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그 장비가 특정 기업에게만 맞는 '맞춤복'이 아니라, 조건을 충족하는 누구에게나 입혀질 수 있는 공정하고 투명한 '제복'이 되도록 정교하게 재단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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