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ㆍ범죄수사ㆍ유전학ㆍ생명윤리 등에 혁명 촉발
말년 흑인 지능 인종차별 발언으로 논란ㆍ생활고

‘DNA(유전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왓슨이 6일(현지시간)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7일 가디언에 따르면 왓슨이 생전에 몸담았던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CSHL)는 전날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호스피스 시설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아들 던컨 왓슨는 “아버지는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며 임종 소식을 전했다.
왓슨은 1928년 4월 6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는 ‘책과 새, 민주당을 사랑하는 가정’에서 자랐다고 회고했다. 조류 관찰가였던 아버지에게서는 과학적 사고와 합리주의적 성향을 물려받았다. 17세에 유전학 책을 읽고 ‘유전자가 생명의 본질’이라는 문장에 사로잡히며 과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1953년에는 프랜시스와 함께 DNA의 이중나선(The Double Helix) 구조를 발견했다. 그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1962년에는 프랜시스,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윌킨스는 X선 회절 연구를 통해 DNA 구조 해석에 중요한 실험적 데이터를 제공했다.
이 발견은 유전 정보가 저장되고 세포 분열 시 DNA가 복제되는 원리를 설명하는 돌파구였다. 이후 생명체의 유전자 조작, 유전자 치료, DNA를 통한 신원 및 범죄자 식별, 가계 추적 등으로 이어졌지만, 동시에 유전정보를 미용 목적이나 세대를 거쳐 전달될 방식으로 바꿔도 되는가 하는 윤리적 논쟁도 불러왔다.
왓슨은 그후 이만한 과학적 발견을 다시 내놓지는 못했지만, 영향력 있는 교과서와 베스트셀러 회고록을 저술했고, 인간 유전체 지도 작성 프로젝트를 이끄는 데도 기여했다. 그는 젊은 과학자들을 발굴하고 지원했으며, 과학 정책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캘리포니아공과대에서 2년을 보낸 후 1955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교수가 됐다. 1976년 하버드를 떠나기 전에, 그는 사실상 대학의 분자 생물학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과학자인 마크 프타쉬네는 1999년 인터뷰에서 회상했다.
왓슨은 1968년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 소장(Director)으로 취임했고, 1994년에는 대표(President), 2004년에는 총장(Chancellor)을 맡았다. 그는 이곳을 과학자와 일반인 모두를 위한 교육·연구 허브로 만들고 암 연구를 강화했으며 막대한 자금을 유치했다.
그러다 왓슨 박사는 말년에 흑인 지능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 등으로 비판과 제재를 받으며 명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는 2007년 런던의 선데이 타임스 매거진에서 “아프리카의 전망은 본질적으로 암울하다”면서 “우리의 모든 사회 정책은 그들의 지능이 우리와 같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모든 테스트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모든 인간이 평등하길 바라지만, 흑인 직원과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느낀다”고 했다.
앞서 2000년에는 “성욕은 피부색과 관련 있다”, “태아에서 동성애 유전자가 발견된다면 여성이 낙태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에 왓슨은 사과했지만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에서 정직 처분을 받았고, 일주일 뒤 은퇴했다. 그는 40년 가까이 이 연구소를 이끌었다.
2019년 방송된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생각이 바뀌었느냐”는 질문에 “전혀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연구소는 그가 받은 명예직을 모두 박탈하며 “그의 발언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왓슨의 삶은 과학사에 남을 ‘위대한 발견’과 동시에, 스스로의 발언으로 인해 빛이 바랜 자기 파멸적 행보를 걸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생활고로 노벨상 메달을 경매 시장에 내놓기도 했다.
미국 국립보건원장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는 2019년 “그의 인종 관련 발언은 심각하게 잘못됐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다”며 “그의 인간관과 사회관이 과학적 통찰력에 걸맞지 않은 점이 안타깝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