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APEC' 한미 관세 분수령⋯속도전이냐 신중론이냐

일본의 '굴욕 협상' 재현 우려⋯美 대법원 판결도 변수

▲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6일 오전 인천공항 제2터미널 입국장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김 장관은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을 방문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과 한미 관세 협상 관련 후속 협의를 이어갔다. (사진제공=연합뉴스)

이달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정부가 한미 관세 협상 후속 협의 타결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협의 장기화로 인한 우리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자칫 시간에 쫓겨 ‘제2의 미일 불평등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우려와 미국 내 사법 리스크라는 변수가 부상하며 후속 협의에 대한 신중론이 힘을 얻고 있다.

9일 통상당국에 따르면 정부는 경주 APEC 정상회의(10월 31일~11월 1일)를 후속 협의 타결의 주요 분기점으로 보고 미국과 막바지 조율에 한창이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을 방문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과 다시 만나 관세 협상 후속 협의를 진행했다. 김 장관의 이번 방미는 대통령실 핵심 고위 인사만 인지하고 통상 당국에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정도로 은밀하고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김 장관은 이달 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APEC 참석차 경주를 찾기 전에도 한미 간 추가 협의를 이어갈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지난달 23일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APEC 정상회의 계기에 맞춰 타결하라는 법은 없다”면서도 “현재 기업 활동에 관세가 영향을 주고 있는 만큼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위해 조속한 타결이 바람직하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과 미국은 올해 7월 말 타결한 관세 협상에서 미국이 한국에 부과하기로 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고, 한국은 총 3500억 달러(약 493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를 시행하기로 큰 틀에서 합의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투자 방식과 이익 배분 문제 등을 놓고 이견을 보여 아직 문서화를 통한 양해각서(MOU) 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대규모 대미 투자 시 발생할 수 있는 외환 시장 불안 가능성을 우려해 미국에 통화 스와프 체결을 '필요 조건'으로 내걸고 배수진을 친 상태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속 협의를 서두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의 값비싼 교훈'이다. 일본은 트럼프 행정부의 자동차 고율 관세를 피하기 위해 5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지만, 최근 "투자 수익의 90%와 투자처 결정권까지 미국이 갖는 독소조항이 포함된 굴욕적 협상"이었다는 비판이 자국 내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미국 내 사법 리스크도 핵심 변수다.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부과한 고율 관세의 위법성 여부에 대한 연방 대법원 최종 판결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신속처리 안건으로 지정, 내달 5일 첫 공개 변론을 연다. 만약 대법원이 정부 패소 판결을 내릴 경우 미국의 관세 정책 근간이 흔들리며 한국은 물론 다른 국가들과 맺은 협상 역시 원점에서 재검토될 수 있다.

한 통상 전문가는 "APEC 정상회의가 중요한 계기인 것은 맞지만,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고 미국의 사법 리스크까지 고려하는 치밀함이 필요하다"며 "속도에 매몰되기보다 국익을 극대화하는 협상의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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