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답하라 1997’.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아이돌 H.O.T의 빠순이(열성 소녀 팬)를 자처했던 그 시절, 본인은 삼성라이온즈 빠순이었다. 특히 그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양신’ 양준혁이 지구 최고의 슈퍼스타 같았다. 주말이면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을 친구들과 삼삼오오 찾기도 했다. 그해 9월의 어느 날, 야구장 맞은편 도로에서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옛 제일모직(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대구공장 부지에 들어선 대형건물 입구에서 야구장 인접 대로변까지 줄지어 선 인파가 엄청났다. 지금 표현으로 하자면 ‘오픈 런’이었다. 알고 보니 삼성 홈플러스 전국 1호점이 전격 개장한 날이었다. 이후 커다란 카트에 100원짜리 동전을 넣은 뒤 한 바퀴 장보기는 대구 엄마들 사이에서 인기 나들이 코스가 됐다. 한동안 홈경기를 보러온 삼성라이온즈 팬들도 유니폼을 입고 맥주, 치킨, 과자를 사러 길 건너 홈플러스에서 먹거리를 사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러다 홈플러스 대구점은 2021년 11월 폐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화려했던 1호점 개장 이후 28년이 지난 홈플러스의 현재는 다소 초라한 모습이다. 전국 매장 곳곳이 폐점을 했고 급기야 올해 3월 4일 홈플러스(최대주주 MBK파트너스)는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갑작스러운 법정관리 소식에 고객과 협력사, 직원을 비롯해 임대점포(테넌트) 입점주 모두 충격에 빠졌다. 일각에선 홈플러스의 청산(파산)을 기정사실로 하는 목소리마저 나올 정도다.
국내 대형마트 2위 사업자인 홈플러스가 결국 회생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개별 기업의 부실 문제를 넘어 오프라인 유통산업이 변곡점에 도달했음을 방증한다. 쿠팡에 C커머스 등 이커머스 플레이어들의 가격 공세, 물류 및 추천 기술 고도화, 소비 트렌드의 다변화 속에서 기존 오프라인 모델만으론 지속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앞서 이마트와 롯데마트 등 경쟁사들이 점포 혁신과 디지털 전환에 속도를 낼 때, 홈플러스는 일부 점포 리뉴얼과 제한적인 온라인 사업 강화에 머물러 화를 자초한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 삼성물산, 삼성 테스코, 영국 테스코, MBK파트너스까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며 거듭된 지배구조 변화는 지속적인 성장 전략 추진을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프라인 유통산업은 계속 쇠퇴하고 결국엔 망할까. 이를 단언하기엔 아직 섣부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오히려 ‘경험하는 소비’에 대한 가치를 증폭시켰다. 팬데믹 이후 서울 성수동과 백화점, 복합쇼핑몰 등에 하루가 멀다하고 들어서는 팝업스토어가 이를 대변한다. 물론 여기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증샷 문화도 한몫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하며 선택하고 싶은 소비자의 요구는 여전하다.
해외 사례에서도 이미 증명됐다. 미국의 백화점 체인 JC페니(JC Penney)는 2020년 팬데믹 여파 속에서 파산보호를 신청했지만, 점포 효율화와 브랜드 리뉴얼을 병행한 끝에 회복세다. 또 일본의 대표 오프라인 유통채널 돈키호테(Don Quijote)는 가격 경쟁력에 집중하기보다는 ‘매장 자체를 즐기는 공간’으로 바꾸며 돌파구를 찾았다. 무계획 소비를 자극하는 독특한 진열 방식, 24시간 운영, 체험형 마케팅 등을 통해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에서 300개 이상 팝업스토어를 성공시킨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최원석 씨는 ‘결국, 오프라인’이란 저서에서 “기업이 ‘제품만’ 팔아서는 생존할 수 없는 시대”라고 확언한다. 그는 희소성 있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브랜드가 팬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인간과 인간의 사이가 그러하듯, 브랜드와 인간도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맞대고 관계를 맺고 대화를 나누며 공감하고 신뢰하게 할 경우, 그 존재(오프라인 공간)의 진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이제 홈플러스에 가장 필요한 것은 체질 개선과 고객의 신뢰 회복이다. 고객·협력사·직원의 불안을 해소하고 이들과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회생의 의미는 퇴색된다. 무엇보다 재무 개선을 넘어 보다 본질적인 질문에 답해야 할 시점이다. 향후 어떤 철학과 가치 위에서 고객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것인가? 홈플러스가 생존 그 이상을 논하려면,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해야 할 것이다. 그 해법이 홈플러스의 생존을 넘어서 재도약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래야만 결국 ‘다시, 오프라인의 시대’가 오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