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너머] 사법의 시간은 평등한가

“특정 사건만 ‘지연된 정의’를 논하는 건 앞뒤가 안 맞다.”

수년간 강제동원 사건을 맡아온 한 변호사가 말했다. 대법원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사건을 전원합의체 회부 9일 만에 파기환송하며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이 사건 쟁점은 크게 복잡하지 않다”고 낸 의견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대법원이 사건마다 진행 속도를 크게 차이 나도록 하는 건 국민의 재판 청구권, 평등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좋아하는 사건, 싫어하는 사건을 선별해서는 안 된다. 이번엔 대법원이 정치적 개입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맡은 사건은 1년 가까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1940년부터 2년간 일본 가마이시제철소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피해자 측이 일본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는데, 1심에서 패소했다가 2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뒤집힌 사건이다.

2심 판단이 바뀐 근거는 대법원 판례였다. 대법원이 2023년 12월 강제동원 손배소 소멸시효 계산 기준을 ‘2018년 10월 30일’로 못 박은 이후 비슷한 취지의 소송은 잇따라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판례가 명확하고 쟁점도 복잡하지 않을 듯한데, 대법원의 정의는 지연되고 있다. 1년은 그나마 짧은 편이다. 근로정신대 피해자가 일본회사에 제기한 상표권 2건에 대한 특별현금화명령 재항고 사건은 이미 3년째 대법원에 머물러 있다.

그사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고령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추후 언론을 통해 ‘몇 년 만의 판결’이라는 시간만 두드러질 뿐이다. 노사 갈등, 성폭력, 군 의문사 등 피해자나 유족이 대법원만 쳐다보고 있는 사건도 부지기수다. 원고는 대부분 약자다.

결국 사법이 정치의 시계를 따라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심지어 이흥구‧오경미 대법관은 이 후보 사건 결정문에서 ‘다수의견 한쪽의 시각에서만 사실관계 판단’ ‘새로운 갈등과 분란 촉발’ ‘교각살우(矯角殺牛)’ 등 강한 어조로 반대의견을 냈다.

같은 대법관들이 이 정도라면 받아들이는 국민은 어떨지 짐작이 간다. 이 사건으로 촉발된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는 최근 ‘특정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전례 없는 절차 진행으로 사법부의 불신을 초래한 점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는 안건 등이 상정됐다.

대선 이후 법관 대표들이 어떤 의견을 표명할지 지켜볼 일이다. 누구에게나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건 법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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