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신경영 선언’은 무엇을 담았나… 법원 “‘51세’ 이재용 선언은 무엇인가”

입력 2019-10-2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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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파기환송심 재판부, 이건희 신경영 거론하며 이재용 부회장에 당부

▲1993년 신경영선언을 하는 이건희 삼성 회장 (사진제공=삼성전자)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재판이 열린 25일, 서울고법 형사1부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 판사는 재판 말미에 이례적으로 당부의 말을 전했다.

정 판사는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시 만 51세 이건희 총수는 낡고 썩은 관행을 버리고 사업의 질을 높이자며 이른바 삼성 신경영을 선언하고 위기를 과감한 혁신으로 극복했다”며 “2019년 똑같이 만 51세가 된 이재용 삼성그룹 총수의 선언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합니까”라고 말했다.

1987년 12월 1일,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 이건희 당시 해외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이자 삼성그룹 부회장은 46세의 젊은 나이에 삼성그룹 회장으로 임명됐다.

해외사업추진위원회는 해외 건설, 플랜트 수출, 합작 등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핵심 계열사 사장을 비롯한 수뇌부로 구성됐다.

이 회장은 경영에서 동물적인 감각을 보였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삼성그룹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이 회장은 그해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각각 나뉘어 있던 가전, 반도체, 휴대전화 계열사를 삼성전자의 한 지붕 아래 들이는 등 사업 구조를 뜯어고쳤다. 이 회장이 삼성의 지휘봉을 잡은 지 5개월도 안 된 시점이었다.

‘포스트 이병철’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이 회장은 세계 1등 기업을 만들기 위한 자신만의 플랜을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이 회장은 평소 말을 아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화두를 던졌다. 이 회장의 한마디는 그 자체로 돌파구가 됐고, 삼성의 도전과 혁신의 동력이 됐다. 1993년 6월 7일, 이 회장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그 대표적 예다.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변화와 혁신을 앞세운 신경영을 선언했다. 당시 이 회장은 17일 동안 회의를 진행하며 현지에 소집한 200여 명의 경영진에게 특유의 위기론을 바탕으로 고강도 혁신을 주문했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또 “변한다고, 변했다고 말만 하면 믿겠는가.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변화한다는 말도 필요 없다. 행동으로 보여주면 된다”고 강도 높게 혁신을 주문했다.

이는 삼성이 1997년 외환위기 등을 극복하고 지금의 글로벌 삼성을 만든 원동력이 됐다.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가 기폭제가 됐다. 1990년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으로 영입돼 삼성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담은 보고서를 이 회장에게 제출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 파기환송심 1차 공판을 마치고 차량에 탑승해 있다. (뉴시스)

후쿠다 고문은 2015년 삼성 사내망인 ‘미디어삼성’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이 회장이 내 보고서를 읽고 ‘이런 일이 있었냐’며 크게 화를 내셨다고 들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자마자 국내 임원들을 불러들였고 그곳에서 굉장한 회의가 시작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에 영입될 당시 모방 제품이 많아 문화 충격을 받았다”면서 “일본 소니가 1류, 파나소닉은 1.2류, 샤프나 산요가 1.5류였다면 삼성은 당시 2류였다”면서 “디자이너들에게 ‘절대 흉내 내지 마라. 오리지널이 아니면 세계 시장에서 이길 수 없다’고 당부했다”고 회상했다.

이 회장의 신경영은 그가 병상에 눕기 전까지 계속됐다.

2010년 경영에 복귀한 이 회장은 “지금이 진짜 위기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나가자”면서 위기의식에서 출발한 ‘속도 경영’을 강조했다.

경영 복귀 4년 만인 2014년 신년하례식에서는 사업 전략부터 기업문화까지 모든 것을 바꾸라는 특명을 내렸다.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21년 만에 나온 고강도 혁신 선언이었다.

이 회장은 “신경영 20년간 글로벌 1등이 된 사업도 있고, 제자리걸음인 사업도 있다”면서 “선두사업은 끊임없이 추격을 받고 있고 부진한 사업은 시간이 없다. 다시 한번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정 부장판사는 이 부회장에게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 버금가는 노력을 요청하면서 실효적 준법감시제도 마련 및 재벌 체제의 폐해 시정 등도 주문했다.

후쿠다 고문은 4년 전 인터뷰에서 삼성이 선구자로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제 1993년의 이야기는 잊어 달라고 말하고 싶다. 1993년 당시는 사원수도 적고 기업 규모도 크지 않아 혁신이 상대적으로 쉬웠다면 지금은 규모도 커져 훨씬 어렵다”며 “1993년보다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삼성의 미래는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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