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코스트코 창업자의 눈물

입력 2019-05-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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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경 국제경제부장

내가 어릴 때 서울에 살던 우리 가족은 외가가 있는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를 했다. 지금이야 대로가 뚫리고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찬 신도시이지만 그때만 해도 일산은 첩첩이 산중에 논두렁 밭두렁, 그야말로 전원 내음 물씬 나는 시골이었다.

이사하고 얼마 뒤 나는 동네에서 신기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동틀 무렵이면 무시무시하게 큰 장갑차들의 행렬이 동네 어귀에 나타나 지축을 울렸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그 광경을 보려고 졸린 눈을 비비며 뛰어나갔다. 어디에서 주워들었는지 아이들이 “헬로, 헬로” 하고 따라가면, 장갑차 뚜껑이 열리면서 미제 초콜릿이며 초코 우유며 딸기 우유가 계속 튀어나왔다. “미제다, 미제!”

가끔 미군이 얼굴을 내밀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면 아이들은 다른 얼굴 생김새 때문인지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하지만 풍요롭고 여유로운’. 그게 내가 처음 접한 미국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왜 갑자기 떠올랐냐 하면 3일 성수동에 문을 연 미국 커피 브랜드 ‘블루보틀’ 때문이다. 오픈 당일 새벽부터 수백 명이 몰려 대기 행렬을 만들고, 심지어 첫 손님은 자정부터 줄을 섰다고 하니, 그 미제 입소문 한번 대단하다 싶었다. 몇 년 전 ‘쉑쉑버거(쉐이크쉑버거)’가 한국에 상륙했을 때도 그렇게 난리통이었다더니.

이런 한국인의 미제 사랑을 일찌감치 알아본 사업가가 있다. 코스트코 창업자 제임스 시네갈이다. 그는 2011년 코스트코 최고경영자(CEO) 은퇴를 앞두고 가진 한 인터뷰에서 코스트코에서 매출 규모가 가장 큰 곳으로 한국 서울을 지목했다. 그는 “서울은 정말 엄청나다”며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서울 인구가 1400만~1500만 명인데, 이 정도 인구 밀도에서 서울만큼의 매출을 내는 데가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언급한 게 “한국인들은 미제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해외에 진출한 기업은 현지인의 입맛에 맞게 제품군을 현지화하는데, 코스트코에서는 판매하는 물건의 3분의 1이 미제라고 한다.

한국에서 겨우 15개 매장을 운영 중인 코스트코의 매출 성장세는 시네갈 창업자가 눈물을 쏟을 만도 하다. 통계 전문 사이트 스터티스타에 따르면 2010년 1조5800억 원이던 코스트코의 매출은 2018년에는 3조9200억 원으로, 8년 새 2배 이상 뛰었다. 포춘에 따르면 코스트코 단일 매장 매출에서 양재동은 세계 최고다.

우리나라 이마트의 지난해 매출이 17조491억 원이었다. 매장 수는 코스트코의 10배가 넘는 158개. 단순 수치만 보더라도 이마트가 1993년 창동에 1호 매장을 연 이후 근 30년간 아무리 공격적으로 영업을 했어도 미제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최근 코스트코의 행보는 배은망덕 그 자체다. 우리 정부가 골목상권 보호 차원에서 제시한 상생안 절차를 무시하고 얼마 전 하남점 개장을 강행했다. 정부가 미리 ‘영업 일시 정지’를 권고했지만 어겨봐야 과태료 5000만 원이 전부이니 그냥 개점을 밀어붙인 것이다. 소비자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겠지만, 주변 소상공인들의 반발은 거세다.

‘커피계의 애플’로 불리는 블루보틀이 일본 다음 해외 시장으로 한국을 고른 것도 한국인의 남다른 미제 사랑을 간파해서일 거다. 미국과 일본 블루보틀 매장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관광 명소가 된 지 오래다. 앞으로는 ‘한국의 브루클린’으로 불리는 성수동에 터를 잡고, 관광 명소로서가 아니라 일상 속으로 파고들겠다는 것이다.

다 좋다. 단지, 한국인의 미제에 대한 로열티를 호구로 전락시키지 말기를 바란다. 애플, 스타벅스, 코스트코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처음 들어올 때는 세상에 없는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잇속을 챙길 때는 세상 냉정한.

우리도 미제에 무조건 열광할 게 아니라 부당에는 강하게 항의하며 우리의 소비 파워를 보여줄 줄도 알았으면 한다. 씀씀이에 맞는 대접을 받자는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블루보틀이 미국에서 탄생한 건 맞지만, 지금은 ‘네스프레소’로 유명한 스위스 네슬레 산하 브랜드다. 미제가 아니다. sue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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