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35. 몽블랑과 마키에(Maki-e)

입력 2019-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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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연구소장

2000년 12월 런던의 한 경매장에 용(龍) 두 마리가 그려진 만년필이 등장한다. 부리부리한 눈에 여의주를 꽉 움켜쥐고 구름 사이에서 노려보는 눈빛이 지금이라도 만년필 밖으로 튀어 나올 기세이다. 펜촉은 엄지손톱만 하고 굵기도 엄지손가락만큼 되었다. 길이는 한 뼘에 손가락 한 마디가 모자란 정도이다. 검게 옻칠된 몸체에 금가루와 은가루를 뿌려 용을 그린 후 다시 옻칠을 한 것이다. 이런 기법을 ‘시회(蒔繪)’라고 쓰고 ‘마키에(Maki-e)’라 부른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나라의 자개공예와 비슷한데 조개 조각 대신 금분과 은분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경매 안내서의 설명에 따르면 1928년 일본 파이로트사(社)에서 만든 것으로 당시 일류 마키에 공예가 쇼고(松鄕·Shogo, 본명은 겐지로우 이지마, 쇼고는 예명이다)가 그린 것으로 예상 낙찰가는 15만~20만 파운드였다. 최종 낙찰가는 23만9250 달러(약 2억6000만 원)로 미국 파커사의 성배(聖杯) 중 하나인 아즈텍(Aztec)이 10분의 1 정도 가격에 거래되는 것을 감안하면 꽤 높은 가격이다. 참고로 성배는 콜렉터들이 가장 갖고 싶은 만년필을 의미한다.

가격은 곧 인기이다. 파커, 워터맨, 펠리칸 등이 2000년을 전후하여 마키에 만년필을 내놓기 시작했다. 몽블랑은 빼고 말이다. 왜 몽블랑은 마키에를 하지 않았을까?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몽블랑은 1등이기 때문이다.

1883년 근대적 개념의 실용적인 만년필이 탄생하고 약 100년 동안 워터맨, 파커, 셰퍼 등을 보유한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던 만년필 시장이 1980년대 초 암흑기를 지나 부활의 시기를 맞았는데 이 시기에 몽블랑, 펠리칸 등 독일 회사들이 내놓은 만년필들이 미국 회사들의 것을 앞지르기 시작했고, 1990년대 들어서 헤밍웨이 등 유명한 작가의 이름을 붙인 한정판 작가 시리즈를 내놓아 성공한 몽블랑이 만년필 세계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2000년대 초 펠리칸사(社)에서 출시된 마키에 만년필

한정판으로 1등이 된 몽블랑은 다른 회사들이 다 하는 일종의 한정판인 마키에를 만들어 작가 시리즈에 쏠린 사람들의 관심을 분산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든다 한들 일본 만년필 회사들보다 못할 것이 뻔한데, 굳이 잘해야 2등인 경기에 출전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 시기 몽블랑의 한정판을 보면 좀 더 쉽게 이해된다. 2000년과 2001년에 내놓은 한정판 용(龍)과 벚(櫻)은 몸통과 뚜껑이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마이센(Meissen) 자기(瓷器)라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몽블랑의 대표 모델이면서 몽블랑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마이스터스튁 149’와 마키에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1952년부터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는 이 제품은 검은 몸체를 가지고 있어 일단 마키에를 넣기 좋은 조건이지만, 금반지 같은 밴드가 위와 아래 그리고 가운데에 3개 등 총 5개로 공간이 협소하다는 것이다. 일종의 그림인 마키에를 그려 넣기엔 이 밴드들이 방해된다. 설사 그려 넣는다 하여도 용처럼 길고 큰 그림은 어렵다. 또 유선형으로 이것 역시 몸체가 곧은 원통형에 비해 위와 아래가 좁아져 같은 그림을 그려도 덜 예쁘다. 현재 86만4000엔(약 870만 원)인 파이로트사의 최고 상위 마키에 모델이 밴드 없는 원통형인 것도 위와 같은 이유이다.

만년필 세계는 소문이 많다. 어떤 회사가 망할 것 같다든가 또 어떤 모델이 단종된다는 이야기 등 그 소문에 값이 오르고 떨어지기도 한다. 결국 그렇게 형성된 가격은 시간이 지나면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몽블랑에서 마키에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소문은 사실일까? 나와도 몽블랑이 바보가 아니라면 ‘마이스터스튁 149’가 베이스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년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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