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응백의 수산물 기행 ④명태] ‘望鄕의 땅’에서 부르는 望魚歌…“돌아와라, 명태야!”

입력 2018-06-29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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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인공 양식 치어 방류했더니 올해 200마리 다시 잡혀… “축! 생환”

▲속초 중앙시장 풍경.

신고산의 처녀와 궁초댕기의 총각

“신고산(新高山)이 우르르 함흥차(咸興車) 가는 소리에 구고산(舊高山) 큰애기 반봇짐만 싸누나”로 시작되는 ‘신고산타령’이란 함경도 민요가 있다. ‘신고산타령’의 노랫말은 경원선과 함경선이 개통되자 함경남도 도청 소재지였던 함흥으로 봇짐을 싸서 떠나는 산골마을 처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표현한다. 노래 속의 처녀가 왜 고향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경원선과 함경선이 개통된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을 참작해 보면, 처녀는 일자리를 찾아서 떠났을 가능성이 크다. 처녀가 떠나면 그녀를 짝사랑하던 총각도 따라서 떠날 수도 있다.

‘신고산타령’과 흡사한 가락을 가진 ‘궁초댕기’란 함경도풍의 신민요가 있다. 그 노랫말에 ‘어랑천(漁郞川) 이백리 굽이굽이 돌아 묘망(渺茫)한 동해 바다 명태잡이 갈까나’라는 구절이 있다. 상상을 해보자. 고산의 한 총각이 처녀를 찾으러 또 함흥으로 떠나지 않았을까? 그들은 함흥에서 만나 본격적으로 사랑을 시작했다. 총각은 명태잡이를 하고, 처녀는 총각이 잡은 명태를 갈라 북어를 말리고, 속은 꺼내 명란과 창난을 만들며 아이 두엇을 낳고 오순도순 부지런히 살았을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 억울했던 조선 어민들

1930년 1월 1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육십 척 발동선이 투망(投網)을 방해’라는 제목에 어업인들 사이 분쟁이 일어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은 발동선이 자망(刺網) 어선의 투망을 방해해 자망 어민들이 총독부에 진정을 내서 관리들이 현장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어부들은 일제강점기에 와서도 여전히 옛날 방식으로 고기를 잡았다. 조선 어부들은 무동력선으로 명태가 지나가는 길목에 그물을 놓는 방식(고정식 자망 어업)으로 명태를 잡았다. 명태잡이가 활발했던 함남 홍원군 삼호항의 경우 조선인 무동력 어선만 많을 때는 약 400여 척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선주들이 대형 동력선을 투입해 수조망 어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자 조선인 어부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대형 배들은 명태가 잘 잡히는 조업 어장에 자망 그물이 방해가 되니 그 그물을 찢거나 훼손하기가 일수였다. 수척의 일본 배들은 조선 어부들이 아예 투망을 못하게 방해하기도 했다. 이에 조선 어부들이 궐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함흥, 원산, 청진, 삼호 등 동해의 각 항구에서는 명태잡이와 명태 가공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명태는 철도망을 통해 전국으로 수송되었다. 명태의 어획과 가공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 반봇짐을 싸고 고산을 떠나온 처녀, 총각도 여기에서 일터를 잡았을 것이다.

망향의 음식이 이젠 관광 먹거리로

명태잡이와 명태 가공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던 부부는 6·25전쟁이 터지자 잠시 포화를 벗어나기 위해 속초로 떠났다. 그들은 속초 청초호 입구 버려진 땅에서 판잣집을 짓고 정착을 했다. 그리고 명태, 도루묵, 가자미, 양미리를 잡고 명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세월은 바람처럼 흘렀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들이 살던 마을은 낙후되었고, 낙후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만추’, ‘가을동화’ 같은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적합했다. 입소문이 나서 관광지로 변모했다. 함경도 아바이들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해서 이름도 ‘아바이마을’이 되었다. 그들이 먹었던 음식은 별미 음식이 되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가끔 먹었던 순대는 아바이순대가 되었고, 명태가 지천으로 잡힐 때 가끔 해먹던 명태순대는 별미 음식이 되었다. 아바이마을 바닷가로는 펜션이 들어서고,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옷을 입은 청춘 남녀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돌아다니며 순대를 맛보고 있다.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

아바이마을에서 맛본 순대 요리들

갯배를 타고 아바이마을로 들어간다. 갯배란 청초호 입구 쪽 좁은 해역을 왔다 갔다 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멍텅구리 배다. 명천명태순대(대표:고희근, 033-638-8893)가 바로 앞이다. 모듬순대와 명태순대를 주문한다. 모듬순대는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가 반반이다. 아바이순대는 일반 순대이고, 오징어순대는 순대의 외피가 당연히 오징어다. 명태순대는 쪄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더 걸린단다.

이윽고 명태순대가 나온다. 명태에서 내장과 뼈를 발라내고 속을 채워 찐 순대다. 속은 야채와 두부, 고기 등 여러 가지가 들어가 있다. 명태 알을 반드시 넣는다고 한다. 속은 색다르고 맛있었다. 하지만 속을 둘러싼 명태는 특색이 있긴 하지만 맛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동태를 사용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생태로 하였다면, 생태탕과 동태탕이 하늘과 땅 차이의 맛을 내듯, 훨씬 더 맛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아바이순대가 맛있었다. 여러 순대를 먹었으니, 배는 만삭이 되었다.

▲명태순대.
어느 틈에 명태박물관은 사라지고

지도에는 속초 중앙시장에 명태박물관이 있다. 명태박물관? 배도 부르니 산책이나 할 겸 명태박물관을 가기로 하고 스마트폰에서 검색해 본다. 2012년 속초시장을 비롯한 기관장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한 박물관이란다. 시장과 의회 의장을 비롯한 십여 명의 높으신 분들이 일렬로 도열해 테이프를 커팅하는 사진이 검색된다.

갯배를 타고 중앙시장 쪽으로 건너간다. 지도상으로 보면 시장 안 어디엔가 박물관이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스마트폰 위치 표시를 확인해 가며 시장을 한 바퀴 돌았지만 찾을 수가 없다. 시장 상인에게 물어보아도 명태박물관 위치를 아는 상인이 없다. 이럴 수가 있나. 인터넷지도에도, 뉴스 검색에도 나오는 명태박물관을 현지 시장 상인들도 모르는 것이다. ‘뭐에 홀린 듯하다라는 말은 이때 사용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탐문을 해나간다. 한 건어물가게에서 드디어 명태박물관에 대해 아는 상인을 만났다.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른단다. 명태박물관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우리 바다에서 명태가 사라졌듯이.

그것은 명태회냉면이 아니었다

속초에는 함흥냉면 잘하는 집이 몇 있다고 소문나 있다. 원래 함흥냉면은 감자 전분을 주원료로 하여 면을 만들고,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가자미회를 고명처럼 얹어 비벼먹는 비빔국수다. 남한에서는 감자보다 고구마가 더 익숙한 식재료여서 고구마 전분과 밀가루를 적당히 섞어 간재미회로 고명을 얹어낸 이른바 회냉면을 함흥냉면이라 이름하여 즐겼다. 회가 들어간 면이 질긴 비빔국수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배가 꺼질 때쯤 속초 사람들이 많이 찾는 함흥냉면 집을 찾는다. 명태회 냉면을 전국에서 처음 개발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기도 하다. 점심시간이면 손님이 줄을 선다고 한다. 주차장의 규모로 보아 충분히 그럴 것이다. ‘수요미식회’에서 촬영했다는 홍보문구도 붙어 있었다. 맛깔나게 보이는 냉면이 놓였다. 면은 쫄깃하고 맛있었다. 그러나 고명으로 얹어진 명태회는 명태회(明太膾)가 아니라 북어채 무침이었다. 북어를 찢어 물에 불려 갖은 양념에 버무린 것이었다. 회(膾)의 사전적인 의미는 잘게 저민 날고기다. 명태회는 없었다.

▲북어채무침 함흥냉면.

한때 땔나무처럼 많았던 그 물고기

우리 물고기 중에 명태(明太)는 별칭이 가장 많다. 북어, 생태, 황태, 먹태, 동태 등 그 상태와 용도에 따라 수십 가지 이름이 있다. 덕장에서 말리다가 떨어진 명태를 낙태(落太)라고 할 정도로 그 별칭도 다양하다. 명태는 이름이 많은 만큼 우리 식생활과 뗄 수 없는 중요한 생선이다. 많이 잡혔기에 다양하게 가공해서 많이 먹었다.

조선 말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李裕元,1814~1888)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내가 원산(元山)을 지나다가 이 물고기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오강(五江, 지금의 한강)에 쌓인 땔나무처럼 많아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했을 정도로 많이 잡혔다.

하지만 2006년 이후 우리 동해바다에서 명태는 사라졌다. 명태가 절멸한 이유에 대해서는 명태 새끼인 ‘노가리’마저 모조리 잡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2014년 정부는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동해수산연구소에서 인공 양식에 성공하여 2016년부터 수만 마리의 치어를 방류했다. 만 2년이 지난 2018년 봄, 강원도 고성 앞바다에 200여 마리, 울진·독도·거제에 각 1마리가 살아 돌아왔다. 축, 생환(生還)!

▲ 아바이마을로 가는 갯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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