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전대규 판사 “한진해운 P플랜했다면 살았을 것…법원 책임 커”

입력 2018-02-2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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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아웃과 법정관리 각각 역할 있어...기촉법 상시화 해야

▲전대규 수원지법 부장판사는 지난해 연합자산관리(유암코), KB자산운용, 미래에셋자산운용 등 부실채권(NPL) 운용사들을 모아 업계의 이야기를 들었다. 회생 중인 기업의 예납금 부담을 낮춰 주기 위해 중소기업진흥공단과 손잡고 14개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전 판사가 인터뷰 중 반복해서 말한 ‘법원의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이동근 기자 foto@
“한진해운의 채권자 정리를 보다 신속하고 책임감 있게 했다면 파산까지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전대규 수원지법 부장판사는 본인이 몸담고 있는 법원의 안일함에 대해 지적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미 법상 근거가 있었던 사전회생계획안(프리패키지플랜·P플랜)을 한진해운에 적용했다면 아까운 기업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는 한진해운 사례에서만이 아니라, 법원이 기업을 직접 구조조정하고 경영하려 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으려 뒷짐 지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법원의 임무는 채권자들을 강제로 조정하는 데 있을 뿐, 기업의 사활은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결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21일 전 판사를 수원지법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달 회생신청이 들어온 기업에 대해 3일 만에 개시결정을 내리며 ‘초단기’ 회생절차를 진행 중이다. 강관 제조업체 미주제강은 전 판사의 지원 덕분에 21일 회생계획 인가를 받았다. 이달 중 변제를 끝내면 지난달 15일 회생신청일부터 약 45일 만에 법정관리를 끝내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 사전회생계획안의 위력이 대단하다. 회생절차를 한 달 만에 끝낼 수 있다는 신뢰가 생긴다면 부실기업들이 알아서 조기 구조조정을 신청할 것 같은데

“이번 개인회생 변제기간이 5년에서 3년으로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사전회생계획을 통한 단기 회생절차 진행도 이미 법 개정 전에 가능한 내용들이었다. 법원이 의지를 가졌다면 사전회생계획을 한진해운 등 부실기업에 적용해서 채권자를 과감히 정리하고 빠르게 정상 거래가 가능하도록 할 수 있었다. 회생·파산 절차에서 판사들이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 특히 채권자 조정과 관련해서 법원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10년 전 회생 사건에서는 대체로 법원이 회생기업의 채무를 면제하는 방향으로 회생계획을 인가했다. 그러나 금융기관들이 휴지조각이라도 쥐고 있기 위해 자꾸 출자전환을 요구한다. 기업에는 채무 면제 시 이익에 따른 과세를 피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조세법상 특례가 다 있기 때문에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출자전환으로 경영권이 바뀌는 사례가 많으니, 기업들이 회생절차에 빨리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을 판사가 바로잡아 주고 제대로 안내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본다.”

- ‘법원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남달라 보인다. 서울회생법원은 최근 기업구조조정촉진법 관련 공청회에서 기촉법 시한을 연장하거나 상시화하기보다는 P플랜 등으로 구조조정 선택지를 일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정반대로 생각한다. 워크아웃 등 시장 중심의 구조조정이 세계적인 시류이다. 기촉법을 상시화해 기업 사활의 칼을 시장에 넘겨야 한다. 법원의 역할은 그러한 구조조정과 기업의 정상화가 빠르게 이뤄질 수 있도록 회생절차를 최대한 신속히 끝내는 것이다. 그리고 회생절차 중 기업 정상화에 방해가 되는 채무를 모두 쳐내는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금융기관이 부실기업 구조조정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법원 회생절차를 밟게 되면 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부지와 자산매각을 통해 이미 손실처리한 채권 일부를 회수하는 데만 골몰하게 된다. 법원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면 금융기관이 워크아웃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회생계획의 수행 가능성 등을 법원이 봐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회생계획을 인가할 때는 이미 그 가능성을 인정한 것과 같다. 회생계획 인가 후 기업이 첫 변제를 성공했다면 바로 종결해서 시장으로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본다. 법원이 감독하려 해서는 안 된다.”

- 사실상 정부의 결단이었던 한진해운 파산은 국내 해운·조선업에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법원에서 어떤 역할을 했어야 하나

“법원이 강력한 건 채권자들을 강제로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산이나 부지 매각으로 자금을 조달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법원이 총대를 메고 과감히 한진해운 채무를 정리해 줬어야 한다. 기업이 파산하면 어차피 채권자들은 빈손이 된다. 채권자들을 불러 모아 의견을 조율하고 기업 정상화에 유리한 방향으로 빠르게 의견수렴을 돕는 것이 법원의 역할이다. 지난달 미주제강이 회생신청을 하기 1주일 전에 회사 경영진과 채권자 등을 만나 조율했다. ‘사전상담(면담)’이다. 어떻게 회생계획을 짤 것인지, 투자자를 구해 놓았는지 등을 회생신청 전에 미리 재판부와 조율하는 것이다. 법원에 신청이 접수되면 신속하게 절차를 진행해 최대한 빨리 종결할 수 있다. ‘법정관리’라는 낙인 때문에 기업 활동에 차질이 생기는 부작용을 없앨 수 있다. 법원의 부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법원의 프로세스는 사건이 접수된 다음에 시작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전상담은 말 그대로 접수되기 전에 판사가 사안을 조율하는 것이다. 형식적인 원칙에 얽매이지 말고 제도적으로 이 절차를 도입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주제강은 회생신청부터 종결까지 한 달 보름 정도밖에 안 걸렸다. STX조선해양과 성동조선해양 등 채무 조정이 필요한 부실기업들이 이렇게 단기간 회생절차를 끝낼 수 있다면 수주 절벽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법원이 기업구조조정에서 해야 하는 역할은 이런 부분이다.”

-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한국GM 구조조정도 사전회생계획이 더 효과적이라고 보나

“한국GM은 법원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지 않다고 본다. 채권 정리보다는 신규자금 투입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법원은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다. 미국GM 구조조정 사례나 한진해운처럼 부채만 해결되면 흑자도산을 막을 수 있는 상황일 경우 법원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법원은 법원대로 역할을 하고, 금융기관 주도의 워크아웃도 존속해야 한다.”

- 지난해 수원지법의 기업회생 종결 실적은 어떤가

“지난해 47건을 종결했다. 수원지법에 부임하기 전인 2016년에는 17건이었다. 작년 접수된 기업 회생 건수는 90건인데, 회생계획 인가도 받지 못한 사례를 제외하고 일단 인가를 받은 사건들은 모두 종결했다고 보면 된다. 2014년 창원지법 파산부 부장판사로 근무할 때 첫해 사건이 60건이었는데, 두 번째 해에는 사건 접수가 96건으로 늘었다. 회생종결이 빠르다는 소문이 나면서 부산지역 부실기업이 창원으로 온 사례도 있었다. 다른 곳에서 진행하던 회생절차를 일부러 폐지하고 법원을 옮기면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채무자들도 법원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가능한 많은 법원의 조력을 받아야 한다. 지난해 상·하반기 두 번씩 맡은 사건의 채권자들과 관리인들을 모아 면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법원과의 소통이 부족하다’ ‘더 신속한 절차를 원한다’ ‘무리한 회생계획이다’ 등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고, 향후 절차 진행에 반영했다. 앞으로 더 많은 재판부가 현장의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여야 한다.”

◆국내 유일 회생법 강의… 모든 소송에서 중점될 것

전대규(48) 판사의 사무실 책상 한편에 놓인 저서 ‘채무자회생법’에는 노란 포스트잇과 A4용지를 오린 메모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지난해 12월 출간된 개정판이라 마지막 수정을 본 지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새 책이지만, 계속 수정하고 보완할 점을 찾은 흔적이었다. 2016년 출간한 전 판사의 저서는 회생·파산과 관련해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학술서다. 1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에는 도산제도의 개요부터 회생과 파산의 절차, 법률해석과 대법원 판례, 실무 쟁점들이 꼼꼼히 수록됐다. 모두 전 판사가 2003년 광주지법 수석부에서 처음 채무자 회생·파산사건을 맡은 후로 직접 경험하고 고민한 내용들이다.

기업은 물론 개인 회생과 파산이 보편화되는 상황에서 책은 출간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전 판사의 책 내용을 400쪽 분량 책자로 요약한 채무자회생법 강의자료를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무료로 배포하던 날엔 200여 명의 변호사가 몰려 줄을 서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지난달 강의 신청은 온라인에서 오픈되자마자 5분 만에 마감됐다. 폭발적인 수요에 비해 국내에서 회생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교육할 만한 인력과 기회는 전무한 상황이다. 일본에서는 사법시험 선택과목에 회생법이 포함돼 있지만, 한국의 경우 사법시험은커녕 사법연수원에서도 이 과목이 없다.

전 판사는 “기업과 개인의 부실을 조기에 정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안착하려면 법관들의 교육 현실부터 바뀔 필요가 있다” 며 “단순히 회생·파산 사건뿐만이 아니라 민·형사 소송에서도 관련 법리가 소송 전체를 흔들 만큼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전대규 판사 누구인가?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사법시험(제38회)과 공인회계사시험(제25회) 합격 후 삼일회계법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1999년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예비판사로 법복을 입었다. 2003년 광주지방법원 근무 당시 파산사건을 맡게 되면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2014년 창원지방법원 부장판사로 근무하며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수석부로부터 파산부가 독립한 시스템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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