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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인물사전] 23. 관나부인
입력 2017-01-03 06:25
다처제 사회에서 투기죄로 수장되다

관나부인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으며, 출신 부의 이름을 앞에 붙여 편의적으로 부르고 있다. 고구려 5부의 하나인 관나부 출신이며, 부모나 형제 관계는 알 수 없다. 고구려 제12대 중천왕의 총애를 받아 소후(小后)의 물망에 올랐으나 거짓말을 했다고 하여 가죽 부대에 넣어져 바다에 수장되었다.

태어난 시기는 알 수 없고 251년(중천왕 4년)에 사망했다. 얼굴이 아름답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는 장발(長髮) 미인이다. 중천왕이 소후로 삼으려 하였으나 왕후인 연씨(椽氏)와 사랑을 놓고 다투다 죽임을 당하였다. 왕후 연씨는 위(魏)나라가 장발을 좋아한다며 위나라 왕에게 바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왕은 왕후의 속셈을 알고 대답하지 않았으나 목숨의 위협을 느낀 관나부인은 중천왕에게 왕후가 왕이 없는 틈을 타서 자신에게 해를 가하려 한다면 반격하였다. 251년(중천왕 4) 중천왕이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자, 관나부인은 가죽 주머니를 들고 왕후가 자신을 바다에 던져 죽이려 한다고 고하였다. 그러나 중천왕은 관나부인이 왕후를 모함한 것이라고 여겨,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수장했다.

▲사진설명: 각저총 묘주부부도에는 한 명의 남편과 두 명의 부인이 보인다. 이로써 고구려에서 일부다처제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김선주 저자 제공)

중국 문헌자료인 ‘삼국지’에는 부여의 풍습을 소개하는 부분에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여자가 투기하면 모두 죽였는데, 투기를 더욱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도 시체를 매장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고구려는 부여와 언어, 풍속 등 여러 면에서 흡사한 점이 많다고 하였으므로 고구려에서도 부인의 질투에 대한 규제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관나부인의 사례는 고구려에서 투기로 인해 처벌된 실제 사례로 주목되었다.

투기에 대한 처벌 규정은 당시 부여와 고구려 사회에서 일부다처제가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유리왕 때 화희와 치희의 사례나, 대무신왕 시절 원비와 차비에 대한 용어 등에서 고구려에서 다처제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왕비도 투기를 하였지만 관나부인만 처벌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관노부가 왕비의 출신인 연나부에 비해 세력이 약했기 때문으로 해석하고 있다. 연나부는 명림답부의 쿠데타 이후로 고구려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고국천왕 이후 지속적으로 왕비를 배출하였으며, 중천왕대에도 연나부 출신으로 여겨지는 명림어수가 254년(중천왕 7년)까지 국상으로 있었다. 255년(중천왕 8년)에는 공주를 연나부 출신 명림홀도에게 시집보낼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천왕이 연노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힘없는 관나부 출신을 희생시켰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관나부인은 강력한 배경을 갖고 있었던 연나부 출신 왕후와의 권력 싸움에 밀려 투기죄의 명목으로 시체도 찾지 못하게 수장된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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