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년 한국여성사, 어떻게 읽을 것인가
1977년, 평양시 역포 구역 대현동 구석기 유적에서 사람뼈 화석이 발견됐다. 우리나라는 산성토양으로 인골(사람의뼈)이 나오는 사례가 희귀한 편이기 때문에 당시 이 사람의 뼈가 발견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 화석인류는 출토된 머리뼈 상태와 크기 등으로 7~8세 정도의 여자아이일 것으로 추정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여성 인골이다. 이 여성 화석인류는 발견된 장소의 이름에 따라 ‘역포인’으로 이름을 붙였다. ‘역포인’ 은 구석기시대에 살았는데,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는 약 70만년전부터 1만년전까지 계속됐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여성 화석 인류인 ‘역포인’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역포인이 발견된 곳은 자연동굴이었다. 이들은 바로 동굴에서 살았다. 이 동굴에는 당시 사람들이 먹고 내버린 크고 작은 짐승뼈들이 발견되어 당시 짐승사냥이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음을 보여줬다. 특히 코끼리나 코뿔소와 같이 큰 동물화석이 발견되어 큰 짐승들에 대한 사냥도 많이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큰 짐승 사냥은 여러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달라붙어 짐승을 몰아넣는 몰이사냥을 해야 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십 명이 달라붙어야 하였고, 생명을 내걸고 힘껏 싸워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짐승 사냥 외에 열매를 따거나 식물의 잎이나 뿌리를 캐는 채집도 이들의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 역포인이 발견된 동굴 앞에 ‘무진천’이라는 크지 않은 하천이 흐르고 있었고, 동굴이 위치한 구릉 산지는 초목이 무성하여 채집하기에 유리한 생활환경이었다. 채집은 복잡한 도구가 없어도 할 수 있으며 사냥보다 비교적 덜 고된 일이나 일정한 경험과 지식이 있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식물들 가운데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골라내야 하였으며 또한 식물의 성숙정도에 따라 또한 절기에 알맞게 뜯어낼 식물이나 열매를 알고 있어야 했다. 동물사냥의 경우 수확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오히려 채집이 더 안정된 식량 공급원이기도 했다.
남녀 하는 일이 달랐으나 남녀불평등한 관계라기보다 상호보완관계
역포 구역 외에도 우리나라에서는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 경기도 연천 전곡리, 충남 공주 석장리, 충북 청원 두루봉 동굴 등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들 구석기 유적에는 주로 찍개․주먹도끼․긁개․자르개․주목대패 등의 ‘뗀석기’가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뗀석기를 근거로 구석기시대부터 남녀 성별에 따른 분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뗀석기 가운데 주먹도끼나 찍개, 찌르개 등 짐승의 고기나 가죽 혹은 나무 같은 것을 베기 위한 칼이나 나무에 비끌어 매어 창끝처럼 쓰인 도구는 사냥을 담당했던 남성이 시용했고, 가죽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는 등의 조리에 사용됐던 도구인 밀개나 긁개 등은 채집이나 조리를 담당했던 여성이 사용했던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성별 분업은 신체적인 성차에 근거한 것이었다. 남자들이 주로 사냥을 담당한 것은 그들이 신장, 체중, 그리고 근력의 우세함이 그 일을 수행하는데 여자보다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임신이나 수유 등으로 인해 남자들에 비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으로 여성들은 여러 날 먼 곳으로 돌아다닐 수 없었고, 아이들을 데리고 식물을 채집하거나 조개류를 채집하는 일을 해야 하였으며, 남성들은 순간적인 힘, 기동력을 요구하며 먼 곳에 가야하는 사냥에 종사했다.
그렇지만 성별 분업이 성별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별에 따른 억압 구조에 대해서는 인간의 본성을 들면서 인류는 출현부터 억압이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구석기 시대에 남녀의 성별 분업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였지 사회적인 차별은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우선 당시 구석기 사회는 공동체적 생활을 영위하는 무리사회로서 권력과 지배계급이 없는 평등사회였다. 이 시기에는 자연과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녀 성별에 따른 먹이 채취는 서로의 활동을 보완함으로써 식량 확보의 안정성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별 분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성이 사냥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나의 무리를 이루어 함께 돌아다녔고, 임신과 양육을 하지 않고 있는 여성들은 죽은 고기를 뒤져먹는 짐승들을 내쫒고 맹수와 싸우며 먹이가 되는 동물을 추격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여성이 담당했던 채집이 사냥에 비해 오히려 안정된 식량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구석기시대에는 가족 단위가 무리를 이루어 공동체적 생활을 영위하는 사회로, 무리 가운데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도자는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은 아니었다. 구석기 시대에는 자연의 변화가 심했고 맹수의 위험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녀 성별에 따른 먹이 채취는 서로의 활동을 보완함으로써 식량 확보의 안정성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역포인’도 비록 10세가 안되어 사망했으나,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채집생활을 하며 때로 사냥을 도우며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제2강=고고학적 유물로 본 여성의 역사(김선주, 중앙대)/ 자료제공=(사)역사․여성․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