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초기에 1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거부당하는 고통을 견뎌내는 사람만이 세상을 바꾸어 놓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미국의 경영컨설턴트 톰 피터스는 흔히 하나의 명품 브랜드가 있기까지는 최소한 10년 정도의 굴욕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굴욕의 기간을 이겨내느냐 여부에 따라 ‘명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은 35세에 과거시험을 접고 10여년간 실학공부에 매진했다. 무릇 이루고자 하면 10년은 매진해야 한다는 ‘10년법칙’을 연암도 실행한 것이다. 결국 그는 10년 후인 45세에 ‘열하일기’를 세상에 내놓으며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연암의 일생은 3기로 나눠 볼 수 있다. 제1기는 35세까지로, 과거시험을 그만둘 때까지 학문에 발을 들여놓고 과거를 보려고 했던 입문기다. 그가 공부를 시작한 것은 16세 때 전주 이씨와 결혼하면서부터다. 연암이 글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장인 이보천이 직접 ‘맹자’를, 이보천의 동생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은 사마천의 ‘사기’를 가르쳤다. 이때 읽은 ‘사기’의 강렬한 현실비판 의식과 인간중심 사상은 연암의 삶과 저술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35세에서 50세까지 연암의 삶은 실학자들과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던 탐구기에 해당한다. 그는 실학자로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 나갔고 ‘열하일기’로 그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그래도 늘 가난한 살림살이로 부인 이씨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결국 가족들의 배고픔 앞에 수모를 감수하고 미관말직의 벼슬길에 나아간다. 제3기는 50세부터 세상을 떠난 69세까지 자신의 이상을 벼슬살이로서 이뤄보려 한 실천기라고 할 수 있다. 연암이 처음 벼슬길에 오른 것은 무려 50세 때인데 건축담당 하급관리인 선공감감역(종9품)이 된 것이다. 당대의 학자가 요즘의 국토해양부의 9급 공무원에 임명된 것이다. 이야말로 실학자 연암의 굴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반년도 못 돼 부인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연암의 독서법은 ‘끌리는 책을 반복해서 읽어라’다. 개성적인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시대 학자들의 필독서였던 사서삼경보다 선비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사기’ 등 역사서나 소설 등을 즐겨 읽었다.

연암에게 배울 수 있는 또 하나는 메모 습관이다. 1780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여름철, 44세인 박지원은 중국 베이징으로 가면서 3개월 동안 겪은 모든 여정과 느낌을 메모했다. 이게 바로 ‘열하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