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을 돌아보다

입력 2014-01-1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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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0주기 추모 행사

▲대법원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 50주기를 맞아 추념식과 학술심포지엄, 특별전시회 등을 개최한다. 사진은 1957년 4월27일 열린 전국사법감독관회의(현 전국법원장회의)에 참석한 가인 김병로 선생의 모습.(사진=연합뉴스)

대법원은 13일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의 서거 50주기를 맞아 법률가이자 정치인, 독립운동가 등 다양한 면모와 업적을 조명하는 행사를 연다고 밝혔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김병로 선생은 1948년 초대 대법원장으로 취임해 사법부 독립의 기틀을 세웠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법률지식을 활용한 독립운동에 힘썼고 민법·형법의 권위자이자 정당 활동까지 아우르는 광폭 행보를 보여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인물로 평가된다.

문필가 고 이은상 선생은 가인 선생의 비문에 ‘민족의 울분을 참지 못해 사회 투쟁을 결심했고, 눈물겨운 변론으로 피를 끓이며 독립투사 구출에 있는 힘을 다하고, 민족정기 앙양과 인권 옹호를 위하여는 언제나 선봉이 됐다’고 썼다.

김병로 선생의 아호인 가인은 말 그대로 ‘거리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고 거처할 곳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독립을 염원하던 김병로 선생이 직접 붙인 것이다.

그는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독립운동가 변론에 몸을 내던졌다. 대한광복단을 결성하고 일제 독립운동 탄압의 본거지 서울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김상옥 의사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형사재판 변론은 유명하다.

가인 선생은 공판에서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 사상은 조선인 전체가 가진 것”이라며 “그런데 이것을 정치 변혁을 도모했다고 하여 처벌한다면 양민을 억지로 법의 그물에다가 잡아넣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또한 그는 광복 후에는 사법부 독립의 기틀을 세웠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도 불편한 관계였지만 법관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이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서민호 의원이 자신을 살해하려던 육군 대위를 권총으로 사살해 기소된 사건에서 1심은 정당방위를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도대체 그런 재판이 어디 있느냐”라고 따졌다.

그러자 가인 선생은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인 나도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며 “무죄 판결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받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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