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란 탄원서는 한국 체육계 무지함이 빚은 대참사 [오상민의 현장]

입력 2013-12-26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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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시스)

금3 은4 동4. 한국 역도의 역대 올림픽 성적표다. 한국 역도는 1948년 런던올림픽 김성집의 은메달을 시작으로 전병관, 장미란, 사재혁 등 스타 선수를 배출해내며 올림픽 효자종목으로 자리를 굳혀왔다. 넉넉지 않은 환경에서도 비인기 종목 설움을 딛고 이룩한 기적 같은 성과다.

그러나 최근 70년간 쌓아올린 위대한 역사가 무참히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8 베이징올림픽 여자 역도 금메달리스트 장미란(30)이 대한역도연맹 회원 300여명과 함께 여대생 청부살해범 윤모씨(68)의 남편인 류모씨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에 사인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경악할 노릇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미란이다. 장미란은 세 번의 올림픽 도전에서 금메달 1개와 은메달 1개를 획득하며 무한 감동과 희망을 안겨줬다. 그리고 올해 초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장미란재단을 통해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선행을 베풀었다. 그의 꿈은 IOC위원이란다.

그런 그가 대체 왜 류씨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에 사인을 했을까. 장미란은 지난 21일 장미란재단 공식 페이스북에 “탄원서에 대한 내용은 없어서 확인하지 못하고… 연맹을 위해 해야 하는 일로 알았다.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저의 불찰…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다”고 공식 사과했다.

장미란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네티즌의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탄언서 사인부터 공식 사과까지 장미란의 언행은 납득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섰기 때문이다.

(사진=장미란재단 공식 페이스북)

당연한 일이다. 우선 탄원서 자체가 황당했다. 류씨는 대한역도연맹(이하 연맹) 제40대 회장이다. 역도인에게는 고마운 큰손이다. 이번 사태도 그런 류씨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류모씨는 회사자금 87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아내 윤씨는 지난 2002년 여대생 하모씨를 청부 살해,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윤씨는 허위진단서를 발급받아 형집행정지를 받은 채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지난 5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장미란의 사과문에 따르면 탄원서의 주모자는 연맹 임원이다. 8명으로 구성된 연맹 임원진은 올림픽 등 국제대회 호성적 공로가 인정돼 체육훈장(청룡장), 대통령 표창,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까지 수상했다. 그래서 배신감이 더 크다. 아무리 연맹이 어렵다 해도, 체육인으로서의 의리가 중요하다 해도 수많은 사람에 피눈물을 안긴 범죄자에게 선처라니. 최소한의 도덕적 책임과 양심마저 져버렸단 말인가.

장미란은 은퇴 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의 길을 걷겠다고 밝힌 바 있다. IOC 위원은 올림픽 관련 행정ㆍ외교 등 국제적 중요 현안을 의논ㆍ결정하는 요직이다. 탄원서 내용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타인의 말만 믿고 흔쾌히 사인을 해주는 사람에게 요직을 맡길 수 있을까.

단지 장미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 사태를 통해 한국 체육계의 집단이기주의와 무지함에 대한 비난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연맹 회원은 중ㆍ고ㆍ대학생ㆍ실업ㆍ동호회를 전부 포함해 1152명(25일 현재)이다. 이중 300여명이 이번 탄원서에 사인했다. 장미란의 주장대로 라면 대부분 내용조차 모르고 역도인으로서의 의리라는 이유로 탄원서에 사인을 했다는 결론이다.

연맹의 부도덕한 행동으로 인해 청부 살인 피해자 가족은 다시 한 번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쥐어야 했다. 한마음 한뜻으로 선수들을 응원하던 국민들에게는 엄청난 배신감을 안겨줬다. 결국 이번 사태는 한국 체육계 무지함이 빚은 대참사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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