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노이라이터(Martin Neureiter·오스트리아 빈대학 교수) 국제표준화기구 SR 26000 기업부문 규격이행 총괄책임자는 2009년 한국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강연에서 “한국은 더 이상 무노조 경영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인권, 환경, 노동 분야에 대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세계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의 전제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기업이 경영과정에서 인권, 환경, 노동 등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를 세부적으로 규정한 국제표준(SR ISO26000)안이 만들어졌다. 이때만 해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우리나라의 관심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당시에 비하면 지금 국내의 관심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국제적 기준에서 보자면 끄트머리에 탑승한 형국이다. 끝물에 올라탔을지언정 이제 시작은 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인 셈이다.
CSR의 국제표준에 도달하기 위한 선진국들의 움직임은 일찍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다국적 기업 포춘 글로벌(Fortune Global) 500에 소속된 기업들은 이미 전 세계 다양한 단체들의 요구에 따라 SR 26000의 준수를 공표했다. 납품업체와 협력업체들에도 이 표준을 준비하라고 통보한 상태라고 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들도 이 규정을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산하 공기업들에도 채택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한다. 기업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와 시민사회의 요구 및 압력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가시화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는 선진국들의 대응 또한 이처럼 민첩하다. 유엔과 OECD가 주도하는 국제표준에 대한 파급효과를 미리 읽고 선도적 대응 체제를 갖춰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국내 기업들의 관심과 노력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기업 생태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도 아쉬운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아직도 우리나라는 사회적 책임에 대해 ‘기업에 대한 부담’이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함으로써 큰 시련이 닥쳐올까 염려된다는 것이다. 굳이 전문가들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최근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갑을 관계’의 논란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기업들의 관행은 국제사회의 요구나 변화로부터 한참 멀리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변화는 빠르고, 대응이 둔해서 발생하는 충격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시작됐다. 최근 불거진 한 우유업체의 이른바 밀어내기 행태는 이 기업 제품에 대한 즉각적인 불매운동으로 이어졌다. 부당한 기업 관행에 대한 시민사회의 눈초리는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이다.
관련업계 동향에 따르면 국제표준에 대한 우리나라 기업들의 관심은 표준인증에 쏠려 있다고 한다. SR 26000의 인증을 통해 이익을 보려는 얄팍한 태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리점을 기업 활동을 확장하는 상생의 관계로 보고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약탈의 대상쯤으로 이용하는 기업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의 흐름은 국제적 표준이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흔히 볼 수 있는 주식의 변칙 상속, 무노조 경영, 비정규직이나 성차별, 환경파괴 같은 영역에도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국제적 표준에서 문제 될 수 있는 리스크를 미리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 오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CSR은 우리에게 더욱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기업 인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선행돼야 하는 이유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업의 목적이 경제적 가치를 산출하는 것이라고 앵무새처럼 대답해 왔다. 이윤을 창출하고 극대화하는 일에 매진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답이 됐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주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기업의 개념은 이미 과거가 됐다. 대신 지금은 지속가능성을 묻는다.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주민의 일터, 복지, 보건 등 사회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라고 요구한다. 개개의 시민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기업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한다. CSR은 기업에 대해서도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 한마디로 기업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 것이다. 국제사회는 지금 우리에게 기업 인식에 대한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