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도 상업화]돈 없으면 아프지 마라? ‘건강 불평등 시대‘

입력 2012-06-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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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비급여 진료 늘리며 돈되는 환자 모시기 치중…의료비 부담 허리 휘는 서민

척추관협착증으로 굽은 허리를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이모할머니는 오늘도 파지를 주으러 다닌다. 분만 시 병원 측 과실로 뇌손상을 받았지만 돈이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해 중년이 넘어서도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서다. 환자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한 청년은 한때 고액이 드는 백혈병 치료를 거부하고 사망보험금을 타기 위해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병실 밖에선 외래 환자 수나 검사 실적에 따라 의사들에게 인센티브가 지급된다. 매일 의사에게 외래 진료 환자수와 병상 가동률이 문자메시지로 통보되기도 한다.

지난해 말 현직 의사가 대한민국 의료계의 민낮을 적나라하게 고발해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속 불편한 진실들이다. 산업의학과 전문의인 송윤희 감독은 대한민국 병원을 ‘하얀 정글’이라 표현했다.

의사간 경쟁을 부추겨 환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국내 의료계 실상을 ‘하얀가운’을 입은 정글에 빗댄 것이다.

불필요한 과잉진료와 실적주의가 난무하는 다큐멘터리 속 병원 현장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대형병원들은 의료서비스 질을 높인다며 너도나도 고가 검사·치료장비를 들여와 환자들을 유인한다. 6인실 병실이 남아있지만 값비싼 1, 2인실부터 환자를 채운다. 건강이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 되면서 대형병원간 상위 1%를 위한 VVIP 건강검진서비스 경쟁도 치열해졌다.

중소형 병원도 마찬가지다. 낮은 의료수가에 임플란트와 MRI, 내시경 등 고가 비급여 진료로 돈벌이에 나선다.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분만과 화상치료를 피하는 산부인과, 피부과도 늘고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현대사회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 국민의 생존권과 직결된 공적인 영역이지만 ‘의료’도 예외일 순 없어 보인다. 수익성 중심으로 이미 의료 시스템은 변화하고 있다.

최근 의료 상업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데에는 우리나라 의료보장 체계 탓도 크다는 지적이다. 올 초 보건사회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전체 의료비 중 가계 직접 부담을 제외한 공공의료비 비중은 2009년 기준 58.2%에 불과하다. 이는 OECD 평균인 71.5%에도 크게 미치지 못한 수준이다.

이처럼 기존 건강보험 수급 체계로는 부족한 수입을 늘리려고 의사들은 건강보험 급여 대상에 제외된 ‘비급여 시술’을 점차 늘리고 있다. 더욱이 아직까지 비급여 진료비는 정부의 가격 통제를 받지 않는 ‘물가관리의 성역(聖域)’이다.

문제는 병원에서 일방적으로 비급여 진료 가격을 정하다보니 그 비용이 병원마다 천차만별인데다 가격 정보마저 제대로 공개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의료소비자인 환자에게 전가되고 있다. 울며 겨자먹기로 비싼 돈을 내고 비급여 검사나 진료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다.

특히 현대인이 걸리는 각종 암이나 백혈병 등 치명적인 중대 질병, 그리고 치아 치료의 상당 부분이 비급여 진료 항목이라는 것도 서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치아우식증 치료의 비급여 비중이 60%에 달하는 현실에서 돈 때문에 치과 치료를 포기하고 병을 키우고 사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가족 중 한사람이 중병이라도 걸리면 가정 경제는 쉽게 휘청거리고 만다. 실제로 기초생활수급자격 신청자 중에서 ‘과중한 의료비 부담으로 기초생활 수급대상이 됐다’는 국민은 18%에 이르고 있다.

이제 “돈으로 건강을 살 수 없다”는 명제도 구문이 될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의료 상업화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해도 국민의 건강권은 지켜져야 한다는 데 누구나 동의한다.

김준현 건강세상네트워크 환자권리팀장은 “환자들의 값비싼 진료비 부담을 덜려면 비급여 가격도 공론화해서 적정가격을 유도해야 하며 물가관리의 한 항목으로 관리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송경준 보라매병원 공공의료담당(응급의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건강불평등을 없애려면 대형병원에 대한 의료쏠림현상을 바로잡아 불필요한 진료를 막는 것이 우선”이라며 “정부차원에서는 적정진료를 유도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갖추고, 대형병원들도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통해 병원 문턱을 낮출 수 있는 프로그램 시행을 통해 의료 소외계층을 보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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