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 신음하는 中企]"협력사 돕겠다"지만 불공정 여전…아직 먼 ‘상생의 길’

입력 2012-05-1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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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성장 ‘빛과 그림자’

중소기업을 향한 불황의 그늘이 점차 길어지고 있다. 자생력이 약한 중소기업들은 불황의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씩 무너지고 있다.

이를 위해 대기업들은 ‘동반성장’이라는 명분으로 중소 협력사들의 지원을 늘리고 있는 추세다. 대기업들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사회적 시선을 바꾸기 위해서다. ‘혼자 잘 사는’ 대기업이 아니라 ‘함께 잘 사는’ 대기업으로 이미지를 변모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실제 대기업들은 최근 몇 년간 협력사들에게 계열사와 비슷한 수준의 복지를 보장하거나 자생력을 키울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책을 펼치고 있다. 일부 대기업들은 자체적으로 ‘동반성장위원회’라는 조직도 만들어 조직적인 중소 협력사 지원에 나서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명(明)’이 있으면, ‘암(暗)’도 존재한다. 대기업들의 공생경영이 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중소 협력사들을 대상으로 한 불공정거래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중소 협력사들은 ‘갑’인 대기업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 같은 불황기에 대기업들과의 지속적인 거래는 중소 협력사들에겐 포기할 수 없는 생명줄과도 같기 때문이다.

‘두 얼굴’을 지닌 대기업과 중소 협력사들의 관계. 대기업들의 내세우고 있는 동반성장과, 중소 협력사들의 현실을 살펴봤다.

▲삼성그룹은 지난 3월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6층 대회의실에서 11개 계열사와 1·2차 협력사 대표, 정부 관계자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삼성그룹·협력사, 2012년 공정거래 및 동반성장 협약식'을 개최했다. 앞줄 우측 두 번째부터 대덕전자 김영재 대표, 동반성장위원회 정영태 사무총장, 공정거래위원회 한철수 사무처장, 삼성전자 최병석 부사장, 전경련 이승철 전무 외 행사 참석자들.
◇대기업, 중소 협력사들과 동반성장 확대 ‘박차’= “중소기업과의 상생은 단순히 대기업만을 위한 게 아니라 한국경제의 근간이 됩니다. 중소기업을 돕는 것이 대기업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신년하례식에서 꺼낸 한마디다. 최근 대기업들의 동반성장 의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해 준다.

국내 대기업들이 최근 몇 년 새 중소 협력사들과의 동반성장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말부터 올 초까지 대기업들은 너도나도 잇달아 동반성장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지난 3월 서초동 사옥에서 11개 계열사와 1·2차 협력사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삼성그룹·협력사, 2012년 공정거래 및 동반성장 협약식’을 개최했다. 삼성그룹 11개 계열사가 1차 협력사 3270곳과 협약을 맺고, 1차 협력사가 다시 2차 협력사 1269곳과 협약을 체결하는 방식이다. 1차 협력사만이 아닌 전체 중소 협력사들의 동반성장을 이끌기 위해서다. 1차 협력사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현금 결제 대금지급 횟수를 월 2회에서 3회로 확대하는 등 다양한 지원책을 펼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지난해 국내 최초로 ‘연구개발(R&D) 성과공유 투자기금’ 1000억원을 신기술공모제로 출연, 거래 여부와 관계없이 기술 역량을 가진 중소기업에 개발자금 지원과 거래 문호를 개방하기도 했다.

재계 2위인 현대자동차그룹도 지난 3월 동반성장 협약식을 열었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동반성장에 지난해보다 2063억원 늘어난 6190억원을 풀기로 했다.

▲현대·기아차는 지난달 25일 서울 코엑스에서 1~3차 협력사들과 함께 하는 채용 박람회를 개최했다.
현대차그룹 동반성장의 골자는 ‘R&D 기술지원과 육성’이다. 그동안 부품 관련 1차 협력사들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면, 이젠 2·3차 협력사들에게도 확대 적용해 영세 업체들의 성장도 꾀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현재 △협력사 R&D 기술지원단 △게스트 엔지니어 제도 △협력사 기술문제해결 지원 △R&D 모터쇼 및 선진 부품기술 벤치마킹 등의 기술지원 제도를 진행 중이다.

이와 함께 지난달 9일엔 협력사들을 위한 채용박람회도 열었다. 우수 인재 채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 협력사들의 인재 확보를 지원하기 위해서다. 현대차는 행사 비용 부담은 물론 기획, 운영, 홍보까지 채용박람회 전 부문을 총괄했다. 이처럼 대기업이 중소 협력사를 위해 채용박람회를 여는 건은 처음 있는 일이다.

SK그룹은 이달 초 '2012 동반성장 실천계획‘을 수립해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갔다. 교육·기술·자금 등 3대 부문의 동반성장 강화가 골자다.

SK그룹은 금융기관과 연계, 협력사들에게 저리로 대출 자금을 지원하는 ‘동반성장펀드’ 규모를 올해 3210억원까지 늘릴 계획이다. 현재까지 협력사 당 이자 감면율은 1.7%에 이른다. 이와 함께 SK그룹은 100억원 규모의 ‘동반성장보험’도 조성할 예정이다. 1차 협력사 부도시 2차 협력사가 보험금을 담보로 사업자금을 대출받는 시스템이다. 연쇄 자금난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안전장치’다.

LG그룹에선 LG전자와 LG화학이 동반성장 확대에 적극적이다. LG전자는 지난 3월 평택 러닝센터 내 건물 한 동을 ‘동반성장아카데미’ 전용 건물로 지정, 중소 협력사 직원들의 교육을 강화했다.

LG화학은 LG상생펀드, LG패밀리론 등으로 매년 500억원 이상의 저금리 대출을 중소 협력사들에게 지원하고 있다. 하도급대금결제도 100% 현금으로 지급하고 있고, 지급기한도 기존 60일에서 7일 이내로 대폭 단축했다.

4대 그룹 이외에도 동반성장을 부르짖는 대기업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일각에선 동반성장을 강조하는 정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액션’에 불과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실제 동반성장위원회는 56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동반성장지수를 발표, 대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정부는 중소 협력사들을 대상으로 동반성장지수를 매겨 우수, 양호, 보통, 개선 등 4개 등급으로 대기업들을 평가하고 있다. 개선 등급을 받은 대기업은 이미지 하락이 뻔하다.

재계 관계자는 “취지는 좋지만 정부가 기업 경영의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하는 모습이 다소 불편하긴 하다”며 “하지만 대기업들도 ‘지속가능경영’을 위해선 동반성장이 필요하다는 데엔 뜻을 모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현실은…” 대기업과 협력사, 여전한 ‘갑을’ 관계?= 대기업들의 동반성장 확대 바람이 거세지만 이를 바라보는 중소 협력사들의 시선은 모두 따듯하지만은 않다. 실제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중소 협력사들이 불황에 따른 대기업들의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뉴스에서는 대기업들의 동반성장 얘기를 많이 하고 있지만 그건 딴 나라 얘기일 뿐이죠. 아직 우리나라는 멀었습니다. 갑을 관계가 확실한 데 대기업 요구에 조그만 중소기업들은 무조건 맞춰줄 수밖에 없어요.”

김포지역 합금철업체 A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모씨의 씁쓸한 하소연이다. 김씨에 따르면 이 업체는 대기업 계열 제강사들에게 합금철을 장기 공급하고 있다.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한 것은 좋지만, 금융 위기 이후 시작된 불황으로 대기업들이 납품 대금을 점차 깎아 현재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씨는 “실제 몰리브데넘(MO) 합금철 업계의 경우, 마진률이 0.5~1%에 불과한 상황”이라며 “내수에선 대기업들과의 관계 때문에 한계가 있어 해외 판로를 뚫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 대기업의 광주지역 사업장에 부품을 납품하고 있는 중소 협력사들도 최근 불똥이 떨어졌다. 대기업 측에서 ‘납품 단가를 부품에 따라 10%씩 낮추는데 협의하자’는 내용의 공문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말이 ‘협의’이지 사실상 ‘통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들 중소 협력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대기업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자칫 잘못해 거래 자체가 중단되면 중소 협력사들은 한순간에 회사 문을 닫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2·3차 협력사들의 경우 타격이 더욱 크다. 대기업→1차 협력사→2·3차 협력사로 이어지며 납품 단가 후려치기의 피해가 커진다. 마진률도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과 협력사들의 불공정 행위 유형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납품 단가 인하 요구’(33.4%)다. ‘부당한 방법의 납품 가격 결정’(8.1%), ‘하도급대금 지급 60일 초과’(7.5%) 등을 크게 웃돈다.

특히 ‘불공정 행위가 없다’고 응답한 협력사들이 1차 42.7%, 2차 22.0%, 3차 8.8%로 집계돼 3차 협력사로 갈수록 부당한 처우를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모 중소기업 관계자는 “보통 1차 협력사들의 경우, 대기업과 관계가 좋아 ‘친(親)대기업’ 성향을 보이는 데 반해 2·3차 협력사들은 불만이 가득한 게 현실”이라고 언급했다.

모 대기업에 자동차 부품을 공급하던 2차 협력사 B사는 지난 3월 1차 협력사로부터 납품 단가를 14% 내려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와 함께 과거에 이미 납품한 부품 일부까지 같은 가격을 적용, 해당 차익을 달라는 요구도 했다. 여력이 없던 B사는 고민 끝에 1차 협력사의 요구를 거부했고, 결국 공장 문도 닫게 됐다. 진정한 피해자는 2·3차 협력사들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애플의 앱스토어 생태계 모델을 동반성장의 올바른 방향으로 지목하고 있다. 애플은 2003년 아이팟과 아이튠즈 모델, 2008년 아이폰과 앱스토어 모델을 선보이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협력하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다.

관련법의 개선에 대한 목소리도 나온다. 지금의 하도급법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납품 가격, 대금지급 조건 등의 불공정성을 주로 규제하고 하고 있지만, 가격은 시장 경제 하에 거래 당사자 간 교섭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는 것.

중소기업연구원 김승일 선임연구위원은 한 보고서를 통해 “법은 거래조건의 공정성 여부를 규율하기 보다는 약자(중소 협력사)의 교섭력을 강화하는 방향의 입법과 집행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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