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훈 KB투자증권 주임
나도 코끝이 시큰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내겐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휘성의 '안되나요'(2002)였고, 음대생 '수지'가 '그녀'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대학교 2학년. 태어나서 처음 소개팅이란 것을 해 보게 되었다. 소개팅 남녀들로 가득하다는 토요일 오후의 신촌 맥도날드 앞.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빛이 났고, 그녀 이외의 모든 사람들과 건물들은 그저 배경에 불과했다. 어색한 인사와 조심스런 대화 속에 맛도 잘 모르는 파스타를 먹었고, 준비했던 웃긴 얘기들은 생각했던 대로 표현되지 않아 답답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음악이 비슷했고, 성격도 잘 통했던 그녀와 나는 그날의 첫 만남 이후 몇 번을 더 만날 수 있었고 금세 친해지는 듯 했다.
그러나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설렘이나 감정만큼 그녀는 내게 큰 호감이 없었나보다. 우리의 연락은 점점 줄어들었고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떠났고,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거절을 당하더라도 내 마음 하나 제대로 고백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연수에서 돌아올 때쯤, 나는 군에 입대했고 그런 식으로 그녀와 나의 타이밍은 맞지 않았다. 군에서 제대를 한 후 그녀에게 다시 연락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3년만의 재회를 앞둔 그녀의 곁엔 남자친구가 이미 있었다. 그래도 내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해준 그녀에게 제대로 된 고백을 하고 싶었다. 3년간의 진심을 담아 노트북에 메시지를 담아 그녀 앞에서 미니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그 때 쓴 배경음악이 우리가 함께 좋아했던 휘성의 안되나요였다.
나랑 사귀어보자는 '고백'이 아닌 3년간 전하지 못한 내 마음이 이러했다는 '고백'을 받은 후 그녀는 펑펑 울었다. 그 눈물에는 오래도록 품어왔던 내 진심에 대한 감동과 내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담겨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눈물을 보며 내 진심이 전달되었다는 생각에 내 가슴 또한 뜨거워졌다.
어쨌든 내 첫사랑은 이뤄지지 못하고 끝이 났다.
그리고 약간은 씁쓸하게도 그 때의 순수함과 애틋함을 지금의 사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때의 첫사랑을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흐른 만큼 나도 그녀도 너무 많이 변했을테고 어설픈 만남으로 인해 설레는 첫사랑의 추억을 괜스레 더럽히고 싶지 않다.
솔직히 말해 영화를 보면서 잠시나마 그녀에게 다시 연락을 해볼까 전화기를 잠시나마 만지작거리긴 했지만 금방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건축학개론을 보며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흘러간 옛사랑 생각에 꽤나 시큰해졌을 테지만, 그 시절 우리가 이제훈이 아니었듯 그녀도 수지가 아니었고, 한가인이 되어 다시 찾아올 확률은 없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