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의 핵’ 현대車노조 선택에 촉각
‘굴뚝 산업’으로 일컬어지는 제조업 분야는 노조의 영향력이 국내 산업 중에서도 유독 강하다. 그 중에서도 ‘노동계의 핵’으로 불리는 현대자동차 노조는 국내 제조업계 노조 중 가장 강성 노조이자 막강 파워를 보유한 조직으로 꼽힌다.
1987년 결성된 현대차 노조는 창립 이후 26년간 단 4차례(1994, 2009, 2010, 2011)를 제외하고 거의 매년 파업을 벌이며 세를 과시해왔다.
현대차 노조에게 2012년은 선택의 기로에 선 해다. 최근 3년간 실리적 노선을 걸으며 ‘연례 파업 노조’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해 왔으나, 지난해 9월 강성 노선의 문용문 노조위원장이 당선되면서 노사 관계가 다시 꼬이기 시작했다.
특히 올해 임협 전망이 어두운 데다 때마침 연말 대통령선거까지 겹쳐 있어 여름부터 현대차 노조가 정치적 투쟁에 나설 경우 산업계와 정치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현대차 노조의 상급조직은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이하 금속노조)이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산별조합 중에서도 가장 강성에 속한다. 현대차 노조가 있기 때문이다.
금속노조의 전국 총 조합원 수는 약 17만명. 이 중 현대차 노조의 규모는 정규직 노조원만 약 4만5000명에 이른다. 전체 노조에서 26.5%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때문에 현대차 노조가 들썩이면 금속노조 전체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현대차 노조의 뜻이 곧 금속노조의 뜻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실제로 금속노조는 현대차 노조의 상급 조직 임에도 현대차 노조의 투쟁 방향에 따라 행동 노선을 결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일례로 현대차 노조 창립 사상 처음으로 3년 연속 무파업 기록을 달성했던 지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금속노조도 산발적 파업만 몇 차례 벌였을 뿐 산업계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는 총파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현대차 노조의 영향력이 워낙 크다 보니 금속노조 위원장도 현대차 노조 출신 인사들이 잇달아 맡아왔다. 정갑득, 박유기, 박상철씨 등 7명의 전·현직 금속노조 위원장 중 3명이 현대차 노조 출신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대차 노조는 금속노조는 물론 우리나라 전 노동계에서 풍향계 역할을 하는 조직”이라며 “현대차 노사의 교섭 성과에 따라 올해 하투와 연중 노사 문제의 향배가 결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먹구름 낀 임협, ‘하투’ 시작되나=오는 6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될 현대차 노사의 올 임협 전망은 매우 어둡다. 지난해 말 문용문 위원장 당선 이후부터 현대차 노사는 각종 현안으로 대립각을 세워왔다. 특히 올해는 임금 인상 문제에서부터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 주간 2교대 근무제 실시, 만 60세 정년 연장 등 임협 주요 현안에서 노사가 큰 이견을 보이고 있다. 3년간 잠잠했던 ‘울산 하투’가 크게 터질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 노조는 올해 8.4%, 15만1696원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평균 8.02% 임금 인상을 요구해왔다. 금속노조의 가이드라인을 따라가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높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이 4000여 회원사에 권고한 평균 임금 인상률 가이드라인 2.9%와 비교하면 3배 이상이나 차이가 난다. 현대차가 높은 인상률을 부른 탓에 다른 제조업 노조도 인상률이 높아질 전망이다. 임금협상이 난항을 겪을 수 밖에 없다.
현대차의 한 관계자는 “근로자들의 형편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며 “내수 자동차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음에도 근로자의 이익만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임금 협상 외에도 난제는 많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현대차는 지난 2월 사내 하청 관련 대법원 최종 공판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 판결 이후 비정규직 문제의 무게 중심은 노조 쪽으로 기운 모양새다.
‘무조건 2012년 도입’에서 ‘2013년 1월 도입’으로 한 발 물러난 주간 2교대 근무제 도입 역시 기아차 국내 공장의 시범 실시 이후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노조는 신규 인력의 채용 증대, 국내 생산 시설의 증설을 주간 2교대 도입을 위한 교섭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그러나 사측은 이 요구안에 대해 ‘납득 불가’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현대차 노사는 최대한 대화로 현안을 풀겠다는 입장이지만 파업으로 진행될 가능성은 높다. 3년간 무파업으로 교섭을 타결했던 실리 노선의 노조 집행부와 달리 강성 노선의 새 집행부의 기세와 고집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현대차 노조는 기아차 노조와의 공동 투쟁을 선언하면서 여차하면 총파업을 벌이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4년 만에 정치 파업 나설까=현대차 노조의 행보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임금 투쟁’이 ‘정치 투쟁’으로의 변질 여부다.
강경 행동의 단초는 임금 협상 결렬에서 시작됐으나 비정규직 문제와 사회 양극화 문제, 노동조합법 개정 등의 문제와 연결될 경우 정치 투쟁으로 연결될 수 있다. 현대차 노조가 정치적 사안 때문에 나선 가장 최근의 투쟁 사례는 지난 2008년 6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촛불집회 참여였다.
올해도 정치 투쟁과의 연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치 투쟁에 대한 문용문 노조위원장의 의지가 워낙 강하고, 하투가 길어질 경우 대선 정국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문 위원장은 지난해 말 취임 이후부터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등 상급 조직 방침에 따라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에서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위한 정치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 19대 총선에서도 자체 소식지를 통해 통합진보당 후보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호소했다.
노조 관계자는 “이번 19대 국회와 대선 정국에서 비정규직 문제와 사회 양극화 문제, 노조법 개정 문제가 거론되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이 나설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현대차 노조가 정치 투쟁에 나설 경우, 상급 조직인 금속노조 산하 강성 노조들도 본격적인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정치 투쟁을 한다 해도 걸림돌은 있다. 파업 이후 생길 노사의 금전적 손해, 업계 안팎의 따가운 시선, 그리고 ‘노-노’ 갈등이다.
노조가 파업을 벌일 때마다 현대차는 엄청난 손해를 봐왔다. 현대차 노조는 설립 이후 총 362일 간 파업을 벌여 112만2370대의 생산 차질, 11조6682억원 규모의 생산 손실을 기록했다. 과거와 달리 짙어진 강성 노조에 대한 사회의 불편한 시각도 노조에게는 고민거리다.
강성 노조 집행부가 정치 투쟁 의사를 보이는 상황에서 현장 근로자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일부 근로자들은 현 노조 집행부에 대해 “근로자들의 후생 복지를 위해 일하라고 뽑아 준 것이지 정치를 하라고 뽑은 것이 아니다”며 곳곳에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반면 경영계에서는 “현대차 노조의 불법 파업에 대해 사측이 파업기간 중 임금 보전 등 관용으로 일관한다면 파업관행은 쉽게 개선될 수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노사 모두 쉽지 않은 국면이다.
<사진설명>
‘노동계의 핵’으로 불리는 현대자동차 노조의 올해 행보에 산업계의 촉각이 쏠리고 있다. 단순한 임금 협상 결렬에 의한 ‘하투’를 넘어서 대규모 정치 투쟁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대차 노조는 기아차 노조와 함께 공동투쟁본부를 꾸리고 지난 20일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사옥 앞에서 선포식(사진)을 갖는 등 대외투쟁 준비에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