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마다 친박계 울타리에 가로막혀
당 복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재오 특임장관이 30일로 취임 1주년을 맞았다.
이 장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명박 정부 탄생 일등공신이다. 뉴타운 광풍이 불었던 18대 총선에서의 충격적인 낙마와 권력투쟁에 얽혀 자의반 타의반 도미(渡美), 10개월 간 권토중래의 시간을 보냈다.
2009년 3월 귀국한 뒤 “아기도 돌(1살)이면 걸음마를 뗀다”며 당 복귀를 노렸으나 친이·친박 계파갈등의 장본인으로 인식되면서 친박계의 울타리를 뚫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국민권익위원장으로 선회, 반부패 선봉장 및 공직자 군기반장을 자임했던 이 장관은 지난해 7.28 은평 보선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선거 기간 “여의도를 넘지 말라”며 당의 지원을 뿌리친 그의 나홀로 선거운동은 올해 4.27 재보선에서 분당 및 김해의 선거운동 모태가 되기도 했다.
어렵사리 4선의 배지를 달았으나 당 복귀는 여전히 요원했다. 8.8 개각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 곁으로 돌아간 이 장관은 이내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통령 1인 중심제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분권형 개헌을 주도했다. 설득 끝에 이 대통령마저 개헌 의지를 천명했으나 이 역시 친박계의 반대에 부딪혀 당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특히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과의 불화는 친이계 와해로 이어지면서 당 주도권을 연합군(친박계+쇄신파)에게 내주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황우여 체제를 출범시켰던 지난 5월 원내대표 경선 이후 7.4 전당대회에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으나 이마저도 ‘홍준표 대세론’에 가로막혔다. 앞서 4.27 분당 보선에선 믿었던 정운찬 카드가 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이 장관은 당으로 복귀, 흩어졌던 친이계를 결집시키고자 했으나 이 대통령의 강경한 만류로 뜻을 접어야만 했다. 이명박 정부 성공에 자신의 정치 명운을 걸었지만 당내 역학구도의 변화는 이 대통령에게 이 장관이 부담으로 작용토록 했다는 게 당내 대체적 평가다.
오직 하늘 하나만을 바라봤던 이 장관의 섭섭함도 만만치 않았다는 후문이다. 특히 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만났던 지난 6월 3일, 이 장관은 트위터에 “오늘은 47년 전 군이 계엄령을 통해 (한일회담 반대) 학생운동을 탄압한 (바로) 그날”이라고 직시하기도 했다. 6.3 동지인 이 대통령에게 구원(舊怨)을 떠올리도록 한 것이다.
최근 독도 지킴이를 자처했던 이 장관은 길고 길었던 외곽 행보를 마무리하고 곧 당으로 돌아온다. 이 대통령이 금명간 특임장관을 비롯한 3~5개 부처에 대한 개각을 단행키로 하면서다. 견제와 갈등설을 사전에 차단코자 토의종군(土衣從軍)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의 승부사적 기질은 당을 진검승부의 굿판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여권의 공통된 견해다. “뚜벅뚜벅 앞만 보고 걷겠다”던 이 장관의 종착지가 대권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박근혜 전 대표가 당을 장악한 상황에서 이 장관이 어떻게 공간을 열고 뜻을 펼칠 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