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 천왕, '반성' 표명한 적 없어
일본 왕실의 근대사는 전범으로서의 오욕의 역사다.
제국주의 시대의 전범 히로히토 일왕(쇼와 천황)의 ‘반성’은 여전히 논란의 불씨다.
전범 책임을 지녔던 당시 왕으로서의 행보가 문제가 됐고 그가 사망한 뒤에도 일본 왕실에 대한 세계의 의구심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01년 태어나 124대 일왕으로 즉위한 뒤 일본 제국주의의 야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일본 국민에게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했다.
그는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1945년 8월 15일 라디오 담화를 통해 항복과 동시에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서의 신격(神格)을 부정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하는 치욕을 겪는다.
또 일왕이 사는 신궁 앞을 지나며 절을 하고 실제로 왕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일본인들에게 왕의 인간선언을 비롯해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잘 나가던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와 항복 선언은 ‘충격’이자 ‘파격’이었다.
히로히토 일왕이 당시 일본군의 통수권을 가진 원수이자 해군의 최고지휘관의 위치에 있었던 만큼 전쟁 책임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으며 1945년 8월 15일 발표한 소위 옥음방송으로 불리는 800자의 종전조서(대동아 전쟁 종결에 과한 조서)상에도 ‘패전’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그 근거다.
물론 그가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것은 일왕에 대한 전쟁 책임과 처벌에 대한 논란 끝에 맥아더 장군이 왕의 존재가 일본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일본 전문가들은 그러나 일본 왕실이 군부에게 모든 전범의 책임을 떠넘기려 한 의도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종전조서에서 히로히토 일왕은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며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