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용카드산업 10년 빛과 그림자
한국의 신용카드산업은 지난 10년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큰 발전을 이뤘다.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카드시장의 규모가 커졌을 뿐 아니라 카드사들의 연체율이나 자기자본비율 등 경영지표도 나쁘지 않아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카드산업의 성장 과정에는 빛과 그늘이 있었다. 카드업계의 과열경쟁이 카드대란을 불러와 카드업계 종사자를 비롯한 많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고 금융시스템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를 극복하며 카드 산업은 한층 성숙했지만 최근 카드 분사 등 지각 변동이 예고되면서 다시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카드 산업의 지난 10년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상황을 진단해본다.
◇불행의 예고…카드업계의 과당경쟁(2000~2002년)= 2000년대 초반 국내 카드시장은 그야말로 과열’이었다. 1999년 말 8000명에 불과하던 카드 모집인은 2000년 말 3만명, 2001년 말 8만명으로 늘어나더니 2002년 3월에는 12만6000명에 달했다.
카드사들은 길거리 회원 모집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카드를 발급하며 과당경쟁을 벌였다. 신용등급을 따지지 않고 카드를 발급하고 이용 한도를 마구 늘려줘 어제는 이용 한도가 200만원이다가 오늘은 1000만원이 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정부의 정책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IMF 사태) 이후 내수를 진작한다는 이유로 신용카드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카드사의 일반대출업무를 허용하고 카드 이용 외 부대업무가 60%를 넘지 못 하도록 하는 규정을 폐지했다.
또 월 70만원으로 정해져 있던 현금대출의 월 이용 한도를 없애고 카드 사용액 연말 소득공제, 카드 영수증 복권제 등을 도입했다.카드사들은 물을 만난 듯 영업을 확대했다. 학생, 실업자 같은 저신용자에게도 카드를 발급하고 대출을 제공하는 등 리스크 관리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카드산업이 팽창하자 전문가들은 위험성을 경고하고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정부는 뒤늦게 길거리 모집을 금지하고 미성년자 카드 발급시 부모의 동의를 의무화하는 등 규제에 나섰다. 현금대출 업무의 비중 제한을 되살리고 카드사들의 대손충당금 적립 기준도 강화했다. 하지만 그동안 부실은 이미 커질 데로 커지며 카드대란은 서서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카드대란, 씻을 수 없는 상처(2003~2004년) = 2003년 촉발된 카드대란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다. 전 국민의 10명중 1명 꼴인 400만명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고 가계부채는 100조원을 넘어서는 등 가계의 피해가 막심했다. 카드빚을 갚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과 신용카드 관련 범죄에 대한 보도가 줄을 이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카드대란은 예견된 재앙이었다. 1999년 경제활동인구 1인당 1.8매에 불과하던 카드 수는 2000년 2.6매, 2001년 4.0매, 2002년 4.6매로 뛰었다. 신용카드 전체 발급 수도 1999년 3899만3000매에서 2000년 5788만1000매, 2001년 8933만매로 급증하더니 2002년에는 1억480만7000매를 돌파했다.
“죽은 사람에게도 카드가 발급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1999년 90조7825억원이던 카드 이용실적 역시 2000년 224조9082억원, 2001년 443조3675억원, 2002년 622조9084억원으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처럼 카드산업은 외형적으로 급성장하며 호황을 누리는 듯 보였지만 사실 내부적으로는 서서히 곪아가고 있었다. 2001년만 해도 2.6%였던 카드 연체율은 2002년 6.6%, 2003년 14.06%로 증가하며 대규모의 부실 채권을 발생시켰다. 여기에 금융시장의 신용경색까지 더해져 카드채 발행 금리는 급등하고 카드사들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거품이 꺼지면서 수익도 감소했다. 2003년 카드 수는 9551만7000매로 줄어들고 카드 이용실적도 480조5436억원으로 떨어졌다. 카드사들의 자기자본비율은 -5.49%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카드업계는 이제 잔치를 끝내고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경영이 악화된 카드사들은 구조조정을 겪어야 했다. 2001년 다이너스카드가 현대그룹으로 매각돼 현대카드로 상호가 변경된 데 이어 2002년에는 동양카드가 롯데그룹으로 매각돼 롯데카드로 상호가 변경됐다. 또 국민카드는 2003년 모기업인 국민은행으로 흡수 합병되고 2004년에는 외환카드, 우리카드가 각각 외환, 우리은행으로 흡수 합병됐다.
또 삼성카드는 삼성그룹으로 부터 5조원의 자금을 수혈 받았고 LG카드는 산업은행의 주관 아래 채권단 공동 관리에 들어갔으나 결국 2007년 신한카드로 흡수 합병됐다.
이로써 2001년 말 8곳이던 전업계 카드사는 2004년말 6곳으로 줄어들고 카드업계의 중심은 전업계에서 은행계로 이동했다.
카드대란 직전인 2002년 전업계 카드사는 카드 발급수 7520만3000매, 카드 이용실적 455조2751억원으로 카드수 2960만4000매, 이용실적 167조6333억원의 은행계 카드사보다 크게 앞섰다. 그러나 2004년엔 은행계 카드사가 4615만5000매, 221조2648억원으로 전업계 카드사의 3730만1000매, 136조5846억원를 앞질렀다.
◇재도약 위한 준비와 성숙(2005~2009)= 카드대란이란 홍역을 치른 카드사들은 이제 리스크 관리에 주력하며 재도약을 준비했다. 신용등급 심사를 강화해 카드 발급을 까다롭게 하고 이용 한도도 상환 능력에 맞게 조정했다.
깐깐한 경영 덕에 카드사들의 건전성은 점차 개선돼 갔다. 2003년 말 14.06%였던 연체율은 2005년 말 5.89%, 2009년 말 1.78%로 점점 떨어졌다. 같은 기간 이용실적 중 현금대출의 비중도 53.54%, 30.48%, 21.06%로 낮아졌다. 또 2003년 -5.49%였던 자기자본비율은 2005년 18.99%, 2009년 29.13%로 대폭 개선됐다.
카드대란의 여파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은행계 카드사들은 은행채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과 전국적인 영업망, 계열 금융사들과의 연계를 기반으로 규모를 키워나갔다. 전업계 카드사들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를 무기로 대응했다.
은행계와 전업계 카드사들이 다시 본격적인 시장 확대에 나서면서 경쟁은 다시 심화될 조짐을 보였다.
◇다시 경쟁 속으로…(2010)= 카드대란 후 7년이 지난 지금, 카드업계는 다시 과열 경쟁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카드산업이 연간 이용실적 472조원 규모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면서 카드사들은 시장 점유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난해 하나은행에서 하나SK카드가 분사하고 국민은행, 농협, 우리은행 등이 카드 부문을 분사시키려 하는 것도 카드 산업의 수익성이 좋기 때문이다. 전업계 카드사로 독립해 본격적인 영업 활동을 벌여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려는 것이다.
산업은행과 우정사업본부가 카드 산업에 진출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잇따른 분사로 카드업계의 중심은 은행계에서 다시 전업계로 이동하고 경쟁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최근 카드사들은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상품을 차례로 선보이며 고객 유치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카드 발급 수는 1억699만3000매를 기록했으며 올 들어 6월까지 카드 수는 1억1187만3000매를 돌파했다. 1인당 카드 수도 4.5매에 달한다.
이에 따라 ‘제2의 카드대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카드업계는 “그 때와는 많이 다르다”며 반박하고 있다. 카드사들의 경영 실적이 양호한 수준이고 금융당국의 관리감독도 강화돼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카드산업의 활성화가 르네상스로 이어질지, 위기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